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추석연휴 개봉된 영화 ‘안시성’이 인기를 몰고 있다. 타 영화에 비해 관객들이 단연 압도적이며 관람객들의 입에서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왜 관객들이 안시성, 고대 당나라와의 전투영화에 열광하는 것일까. 
안시성 전투(AD 645)는 1백만에 가까운 당나라 대병과 혈전을 벌인 고구려 전사들의 처절한 역사다. 이 전쟁이 특별한 것은 당 태종이 직접 참전, 군사들을 지휘했다는 점이며, 결국 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치욕적인 패퇴를 했다는 데 있다. 

당 태종은 왜 고구려 정벌에 직접 나선 것일까. 당시 당나라 안의 사정은 고구려 정벌의 불가함을 지적하는 여론이 많았다. 그러나 태종은 거병을 명령하고 손수 검은 색깔의 빛나는 갑옷을 착용, 지휘봉을 잡았다. 당 태종은 포고문을 내려 군사들을 독려했다. 

‘수나라 때 고구려 출정에서 죽은 장병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은 만행을 응징하겠다.’

안시성은 당에서 고구려로 통하는 대로에 위치한 성이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랴오닝성(遼寧省) 창다철도(長大鐵道)의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주변의 여러 성을 차례로 정복한 태종은 안시성에서 대오를 정비한다. 성을 포위했지만 안시성주는 결사항전을 선언하고 고구려 전사들은 당군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었다. 당나라 장수들은 분노해 ‘성을 점령하면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재물은 모두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때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고연수(高延壽), 고혜진(高惠眞)이 이끄는 고구려·말갈 연합군 15만명을 출병시킨다. 후원군은 안시성 동남 8리 떨어진 주필산 평지에서 당군과 조우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못해 당나라 군대에 패배한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말갈병사 3300명이 산 채로 매장되고 말았다. 왜 당군은 어떤 원한으로 말갈전사들을 산 채로 땅에 묻은 것일까. 용감했던 말갈병사들의 후환이 두려웠던 것인가. 고구려를 도운 말갈족에 대한 경고였을까. 고구려 군사들을 대륙의 내지로 보내 백성을 삼은 것과는 다른 조치였다. 

당 황제는 성을 점령하지 못하자 60일에 걸쳐 성의 동남쪽에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해 토산(土山)을 쌓아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무너진 성벽 사이로 빠져 나와 토산을 점령하기도 했다. 이 토산의 유구는 지금도 안시성 옆에 있어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성을 포위한 지 88일째 되는 음력 9월, 만주벌판은 혹독한 추위가 몰려 왔다. 장병들은 사기가 꺾이고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안시성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군사들은 여러 갈레로 나뉘어 후퇴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수레를 탔지만 진흙뻘 속에 바퀴가 빠지게 된다. 중국 측 기록을 보면 당 태종은 갑옷을 벗고 직접 내려와 수레를 밀었다고 한다. 

고구려 본기 제9 보장왕조에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성주가 성에 올라 송별의 예를 보이자, 당 황제는 성을 굳게 지킨 그들의 충심을 가상히 여겨 합사비단 100필을 주면서 그 임금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

고구려 기록에는 대승을 주도한 성주 이름이 안 보인다. 성주가 양만춘이라고 기록된 것은 조선 유학자 송준길의 문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야사에만 나온다. 

영화 안시성의 성공은 강했던 고구려사에 대한 국민적 향수를 반영한 것인가. 오늘이 제70주년 국군의 날. 열악한 군사라도 국토수호의 결의와 사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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