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왕도 공주 백제모습 살려야
[이재준 문화칼럼] 왕도 공주 백제모습 살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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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고대 사람들은 붉은색을 벽사(僻邪)용으로 썼다. 무덤을 만들면 시신 주위에 붉은 흙을 뿌렸다. 액을 막기 위한 부적도 주사(朱砂)로 그린다. 동짓날 붉은색 팥죽을 쑤어 먹는 풍속도 귀신이 붉은색을 싫어한다는 속신에서 나온 것이다. 

붉은색은 고구려 유물의 특징이다. 와전(瓦塼)을 보면 와당은 대개 붉은색을 띠고 있다. 백제 와당은 유백색이거나 회색이며 신라와당도 백제 것을 닮았다. 통일신라시대 와당들은 고열로 단단하게 구어 청회색을 띤다. 

그러나 고구려는 소성도(燒成度)를 약하게 해 붉은색을 냈다. 그리고 가마에서 검은색으로 태어난 기와는 붉은색을 칠했다. 이 같은 색을 칠한 기와가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벽화에도 등장한다. 또 출토되는 일부 막새에서도 색을 칠한 유례가 찾아지고 있다. 

왜 고구려가 붉은 색깔을 좋아한 것일까. 그것은 이들이 하늘, 즉 태양의 후손이라고 생각한 사상과의 연관을 생각할 수 있다.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탄생 설화 속에 나오는 아버지 해모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다. 

고구려가 태양에서 산다는 삼족오(三足烏)를 특별히 로고화한 것은 태양숭배의 사상에서 비롯된다. 삼족오는 다리가 세 개 달린 상상의 새다. 중국 산해경에도 나오는 삼족오는 고대 한대(漢代) 그림 벽돌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고구려만큼의 완성도가 없다.  

고구려 삼족오는 가장 완벽한 태양의 새다. 긴 부리를 가진 당당한 모습과 힘찬 비상은 대륙을 지배했던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보는 것과 같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에서 나왔다. 시조 온조는 북부여계인 우태(優台)의 아들로 보이지만 개국 초기 나라를 건국하면서 동명왕(주몽)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주몽을 받든 것은 어머니 소서노의 당부도 있었겠지만 역대 왕들은 대를 이어 동명의 사당을 참배하고 깎듯이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백제는 삼족오를 앰블럼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백제 유적에서 삼족오 문양의 와당은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백제의 지향은 불교 성지였던 중국 남조(南朝) 양(梁)나라에 대한 이상의 실현이었던 것인가. 성왕 대는 유대가 깊어 잦은 교류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건축기술의 도입이었다. 양나라에서 와박사(瓦博士)를 대거 보내 와당 만드는 방법과 고도의 건축기술을 가르쳤다. 양나라 무제(武帝)는 불교에 심취한 성왕에게 가장 호의적이었으며 특별히 예우했다. 

성왕은 공주(웅진) 중심에 대통사(大通寺)라는 대 가람을 지었다. ‘大通’은 바로 무제의 연호이며 불사는 양나라와 백제의 국태민안을 염원한 산물이었다. 대통사지는 현재 공주박물관에 소장된 석조(石槽)로 보아 규모가 매우 컸던 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은 공주시 구도심이 되어 옛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얼마 전 한옥 부지를 발굴하고 있는 학술조사단이 대통사지에서 붉은색을 칠한 기와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암막새가 시설되는 연함(椽檻)에 붉은색, 즉 단청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기와 일부에 주칠이 있다고 단청을 언급한 것은 조급한 판단으로 생각된다. 일본 나라, 오사까 등지에는 백제계 후예들이 지은 많은 고건축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들 건축물에는 단청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통사 백제장인들도 기와에 붉은색을 칠한 것일까. 

백제시대 건축물은 현재 한 채도 남아있지 않다. 천수백년 잦은 외침이 지표상의 구조물을 무참히 앗아갔다. 왕성 공산성에 있는 공북루(拱北樓)도 조선시대 건물이다. 왕성이라는 말이 무색하며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만큼 왕성만이라도 백제시대 양식 건축물이 복원돼야 하지 않을까. ‘왕도 공주 백제는 없다’ 주칠을 한 대통사 기와 조각의 출토를 보면서 아쉬움이 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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