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군의 지리멸렬 이대로 안된다
[이재준 문화칼럼] 군의 지리멸렬 이대로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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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고대 신라는 당(唐)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했으나 위기는 금방 닥쳐왔다. 당나라가 신라 내정까지 간섭, 통치하겠다는 야욕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백제왕자인 부여 융(隆)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해 은근히 신라와 반목하게 한다. 

신라인들은 분노했다. 오랜 기간 전쟁을 지휘했던 군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 선봉에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있었다.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당을 사대하는 것처럼 위장하며 곳곳에 주둔하고 있는 당나라 군사들을 축출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 한반도는 다시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 빠진다. 

신라군은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한반도 지형에 익숙했으며 전술이 뛰어났다. 그리고 국가사수 의지가 드높았다. ‘전쟁에 나가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임전무퇴 정신이 지배했다. 

육박전을 수행하기 위한 설진(設陣)에도 특별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당나라 병기보다 우수한 신병기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성(城)위에 비치해 한번에 수십발을 쏠 수 있는 포노(砲弩)가 대표적이었다.

신라 포노병은 군 편제에서 약 10% 정도 차지했다. 신라 구군(九軍)의 숫자를 5만명으로 치면 5천명인 셈이다. 이들이 산성에 진을 치고 한번에 열발씩을 장전해 쏘았을 경우 한번에 5만발의 화살이 적진을 향해 비 오듯 쏟아지는 셈이다. 실지로 신라 포노병은 675년 기병들이 주력군이었던 20만명의 당나라 말갈 연합군을 대패 시켰다. 

이 전쟁은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가 신라 문무왕을 잡아오라는 특명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군은 전군을 동원해 놀라운 병기로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무너뜨렸다. 

이 전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공훈을 세운 이들은 결사부대 역할을 한 ‘화랑도’였다. 김유신 장군의 아들 원술랑(元述郞)이 이 전쟁에서 낭도로 편성된 낭당(郎幢)을 지휘했다. 낭당이란 바로 화랑도를 주축으로 구성된 최정예 부대다. 

앞서 원술랑은 당나라와의 한 전투에서 패전하고 돌아온다. 김 장군은 아들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희 전우들이 전사했는데 혼자만 살아 돌아왔는가?” 김 장군은 죽을 때까지 아들을 만나지 않았다. 

나중에 매초성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 왔을 때 홀로 남은 어머니마저 아들을 만나지 않았다. 이것이 신라 사회의 냉엄한 ‘무사정신’이었다. 

측천무후는 다시 대병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 중신들이 신라만큼은 결코 이길 수 없다고 반대한 것이었다. 문무왕과 용감한 군인, 국민들의 일치단결이 파병을 중지 시킨 주된 이유였다.

이때 만약 신라가 단합하지 못하고 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 영토가 됐을지도 모른다. 대륙 주변에 있던 강한 국가 위구르, 흉노, 거란, 선비, 말갈 등과 같은 망한 민족 신세로 전락했을 게다. 위구르 소수민족의 독립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저항은 오늘날 중국의 최대 골칫거리다.  

계엄문건을 둘러싼 군 최고 간부들 사이의 책임 전가, 하극상을 보면서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어쩌다가 우리 군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나. 이래가지고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제대로 군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들린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군의 기강과 사기를 다시 세우고 강한 군대를 육성하는 마스터플랜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삼국통합 과정에서 처절한 대당투쟁으로 나라를 구한 신라 역사를 교훈 삼았으면 한다. 군이 지리멸렬하면 나라가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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