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백제 때 쌓은 황산성(黃山城)이 있다. 황산의 우리말은 ‘눌메’다. 지금 논산이란 지명 유래가 이 성에서 비롯된 것인가. 백제 말 계백장군이 결사대 5천명을 데리고 신라 5만대군과 싸우다 전사한 황산벌을 지켰던 요새다. 

필자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역사적 현장을 20여년 만에 다시 답사했다. 병풍 같이 두른 천호산을 바라보는 황산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백제 슬픈 역사를 지켜 온 연산천도 유유히 흐른다. 그러나 어디엔가 있을 법한 유적비나 5천 결사대의 무용을 기리는 징표 하나 찾을 수 없었다. 

필자가 충청지역에서 근무했을 때 관계 요로에 이 지역에 대한 기념물 조영을 건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계백장군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논산시 부적면 지역에 군사박물관까지 세워진 것을 알았다. 사실 말무덤이라고 전해 오는 계백장군의 묘소는 학자들 사이에도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대두된 적이 있다. 

신라 5만 대군의 사비성 진격로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 연구를 해왔다. 그중 고(故) 정영호 박사(단국대)의 ‘신라백제공격로 연구’가 실지 답사를 통한 논문이란 점에서 호응을 받았다. 그는 상주에서 보은-옥천(구진베루)을 지나 금산 추부에서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격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보은 삼년산성, 옥천 고리성(環山城)의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지역을 면밀히 답사한 결과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즉 상주 백화산성에서 무열왕(김춘추)의 전송을 받은 신라군은 황간-양산을 지나 금산 복수-진산-탄현을 거쳐 벌곡을 통해 천호산을 넘었다고 보는 것이다. 보은 옥천에서 출발한 신라군은 금산 벌곡에서 합류하지 않았을까. 

이 행로가 바로 옛부터 상주와 부여를 잇는 직선 통로였다. 그리고 황간-탄현 길은 금강의 지천이 흘러 수량이 풍부하다. 고대 군사들의 이동에는 물을 뗄 수 없다. 군사들의 행군과정에서 물과 식량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영동에서 금산 진산으로 통하는 도로에도 맑은 실개천이 흐른다. 대군이 쉬어 갈 수 있는 광장도 있다. 신라는 영동을 확보하면서 이 공격로를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호산을 넘은 신라대군은 황산성을 중심으로 연산천을 막은 백제 결사대와 조우한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계백은 험난한 지역을 골라 3개의 영을 쌓아 대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영은 당연히 황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인근 여러 야산이 백제의 진영으로 선택됐을 것이다. 

황산성 아래 마을이 재미있게도 ‘관동리’다. 이곳은 속칭 관창골로 불리며 속설에는 관창이 계백장군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곳이다. 황산성의 입구이며 연산천을 낀 넓은 들녘이다. 

필자는 황산성을 올라가 흩어진 와편 가운데서 백제 연화문 파편을 찾았다. 이 와당은 한 눈에 백제 후기 것으로 높은 주연대와 정연한 연판을 장식한 것이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백제시대 토기 손잡이 연질 파수부도 수습했다. 틀림없는 백제의 잔영이다. 

황산성은 사적(史蹟) 지정이 안 돼 정비 사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연산면 주민자치위원회에서 발을 벗고 나섰다. 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짚을 깔고 잡초를 제거했다. 성을 찾는 이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전국의 여러 유적을 답사해 봐도 이들처럼 향토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큰 단체는 찾기 힘들다. 

황산벌 백제 5천 결사대의 죽음은 결사 호국 의지를 보여준 강인한 민족사의 상징이다. 이곳에서 전사한 신라 화랑들의 용맹도 그렇다. 동서 화합을 위한 관창과 전사들의 추모비라도 세움직하다. 국가의 안보가 가장 절실한 과제로 떠오르는 이 시기, 가장 위대한 역사의 현장에 대한 정부당국의 관심과 노력을 주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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