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터, 한약국, 이발소’… 소설에 담긴 청계천 흔적
‘빨래터, 한약국, 이발소’… 소설에 담긴 청계천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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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해 놓은 청계천변 이발소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5
재현해 놓은 청계천변 이발소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5

천변풍경展, 박태원 소설 소재
청계천변서 빚어지는 삶 담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그는, 연해, 자기 머리 위에 가위를 놀리고 있는, 에 스물대여섯이나 그밖에 더 안 된 젊은 이발사의, 너무나 생기 있어 보이는 얼굴을, 일종 질투를 가져 바라보며, 현대의 의술이 발달되었으니 무어니하는, 그 말이 다 헛말이라고(생략)’

구보 박태원이 1936년 잡지 ‘조광’에 연재한 소설 ‘천변풍경’에는 이발소가 등장한다. 이발소는 전통적인 사회와 근대적인 사회를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장소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신체발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에는 머리를 자르는 것은 천한 사람이나 승려로 여겼다. 따라서 전통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등장할 수 없는 것이 이발소와 이발사였다.

이처럼 박태원이 소설 청계천변을 연재한 1930년대는 도시로서의 면모를 막 갖춰 가고 있었다. 청계천은 서민들의 보금자리이자, 삶과 문화가 얽혀 있는 곳이었다.

조선의 풍광(사진), 빨래하는 여인들(일제강점기) (출처: 청계천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선의 풍광(사진), 빨래하는 여인들(일제강점기) (출처: 청계천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전통과 근대 조화 이룬 청계천

박태원이 천변풍경을 연재하던 1936년 무렵 청계천변에는 빨래터, 한약국, 포목전 등 조선시대 이래 전통적인 시설들과 이발소, 하숙집, 카페, 식당 등 근대적인 시설이 공존하고 있었다. 전통과 근대는 이들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의식 안에도 존재했다. 1930년대의 청계천변은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면서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천변사람들은 이 변화에 혼란을 느끼면서도 근대적 생활양식에 서서히 익숙해져 갔다.

소설 속에는 옛 빨래터를 배경으로 한 삶도 잘 담겨 있다. ‘정이월 대독 터진다는 말이 있다. 딴은, 간간히 부는 천변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들 시립지는 않은 모양이다’

청계천 빨래터는 여성들의 공동의 작업장이자 사교와 친목의 공간이었다. 천변에서 일어나는 사건 소식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곳이었고, 이곳을 통해 퍼져나갔다. 과거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돈을 주고 빨래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값을 치르고 빨래를 하는 모습은 도시의 자본주의 논리가 이곳까지 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무렵 대도시에는 ‘카페’와 ‘빠(bar)’가 생겨났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평화카페는 ‘광고 모퉁이에 있다’라고 적힌 것처럼 실제 다옥정 1번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의 카페는 차를 마시고 예술작품이 발표되는 다방과 구분됐고, 술과 웃음을 파는 유흥문화의 중심이었다.

‘화신백화점’도 유명했다. 1931년 조선 최고의 상인으로 불린 박흥식에 의해 근대적 백화점으로 영업을 시작한 화신백화점은 1935년 화재 이후 1937년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의 서관을 신축해 매장을 확장했다.

한국인 건축가 박길용이 설계한 신관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을 뿐 아니라 내부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옥상에 전광 뉴스판이 걸려 준공되자마자 장안의 명물이 됐다. 당시 서울에 다녀간 시골 사람이 가장 먼저 받는 질문이 “화신에 가 보았느냐”였으며 “화신에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식당에서 비빔밥을 먹었다”는 것이 큰 자랑거리였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일본인 거리인 충무로와 조선인 거리인 종로로 크게 나뉘었는데, 이 종로의 상권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화신백화점으로,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백화점이었다.

선조들이 사용한 신발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5
선조들이 사용한 신발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5

◆1930년대 경성과 청계천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이 발표됐다. 이는 경성을 대대적으로 개조 확장하려는 ‘대경성계획’의 일환으로 청계천의 전면 복개 구상이 활발히 논의됐다. 이는 군수물자의 빠른 수송을 위한 목적이 컸으나, 재정문제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고 복개는 극히 일부분에 그치게 됐다.

본격적인 복개공사는 1958년부터 시작돼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됐다. 청계천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고 복개공사에 들어가면서 빈곤과 비위생의 상징과 같이 됐다. 하지만 이곳은 동네 아낙네들의 빨래터이자 아이들의 놀이터, 수많은 사람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품은 곳이었다.

한편 이 같은 내용의 청계천을 중심으로 ‘천변풍경’ 특별전(展)은 7월 1일까지 서울 성동구 청계천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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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호 2018-05-15 10:41:19
청계천의 과거를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