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대 민간학살에 앞장선 서북청년단의 청년이 다녔던 영락교회를 창립한 한경직 목사. 한경직 목사는 자서전에서 영락교회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제주 43.사건)을 평정했다고 증언했다. (출처: 한국기독교흑역사 캡처) ⓒ천지일보(뉴스천지)
제주 4.3사건 대 민간학살에 앞장선 서북청년단의 청년이 다녔던 영락교회를 창립한 한경직 목사. 한경직 목사는 자서전에서 영락교회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제주 43.사건)을 평정했다고 증언했다. (출처: 한국기독교흑역사 캡처)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이홍종 목사와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최형묵 목사가 이끄는 제주 4.3평화기행단 70여명은 14~15일 제주4.3 유적지를 탐방했다.

기행단은 14일 평화공원에서 위령제단에 헌화·참배한 후 너븐숭 기념관 등 유적지를 순례했다. 이튿날에는 의귀리와 알뜨르비행장 등 제주4.3 현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보수 개신교의 흑역사가 담긴 제주4.3사건은 ‘제주4.3사건’ ‘제주4.3사태’ ‘제주4.3혁명’ 등 해석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한 사건’으로 정의돼 있다.

제주 4.3사건 당시 무장대와 토벌대 간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희생된 주민은 3만여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4.3사건 진상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희생자의 80%가 토벌대에 의해 학살됐고, 이승만 대통령의 강경진입이라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었다고 규정돼 있다.

토벌대의 구성은 육지부에서 제주도로 파견된 응원경찰 즉 전남경찰 전북경찰 경기경찰 철도경찰과 대한민국 육국 제9연대와 제2연대 등이 있었다. 여기에 군과 경찰복을 입고 등장한 서북청년회가 포함됐다. 서북청년회는 제주 4.3사태(1947~1954년) 등 잔인한 테러와 방화, 강도, 강간, 절도 등 학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월남자들로 구성된 극우단체였다.

제주 4.3사태 사건희생자는 신고 접수된 결과만도 1만 4231명이나 되며 대부분 공산당 빨갱이로 몰린 민간인이었다.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와 태극기를 들고 다니며 강매하고 이에 불응하면 공산당 빨갱이로 누명을 씌워 고문·폭행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서북청년회의 실체는 사태 후 46년이 지난 2000년 진상을 조사하며 드러났다.

눈에 띄는 점은 서북청년회 상당수가 개신교인이었다는 데 있다. 개신교가 추앙하는 고(故) 한경직 목사는 미군정 시절 민간인 학살의 선봉장이었던 ‘서북청년회(서청)’의 회원이었던 영락교회 청년들의 영적 지도자였다. 한 목사는 자서전인 단행본 ‘한경직 목사’에서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어요.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라고 말해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한 목사는 서북청년회가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돼 조직됐다고 언급했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또 일각에서는 당시 목회자들이 민간학살의 배후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tbs교통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과의 인터뷰를 갖고 당시 역사적 상황을 언급했다. 그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보수 개신교인들은 미국에 대항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선봉장이 됐다고 강조하며 제주 4.3사건, 신천학살 등을 언급했다. 한 교수는 “교회 청년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은 제주도 빨갱이라며 사람들을 죽였다”며 “안타까운 게 민간인 학살에서 반드시 있는 게 선별 절차가 있었는데, 손가락질을 해서 죽이는 쪽 살리는 쪽을 선별했다. 그 역할을 목사님들이 직접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해 충격을 줬다.

미군 정보보고서에서는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적었고, 군 내부에서는 ‘초토화작전’으로 불렸다. 이 초토화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집중적으로 토벌대에 의한 집단 학살이 행해졌고, 4.3사건 희생자 3만여명 중 대부분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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