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窓]북중 혈맹관계, 그 원류와 향후 전망
[동북아 窓]북중 혈맹관계, 그 원류와 향후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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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로마는 왕정, 공화정, 제정 기간 자국의 방위는 타인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담당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병역을 치러야만 시민의 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득세가 없는 대신 자신의 몸으로 직접 병역을 치렀는데 이를 로마인들은 ‘혈세’라 불렀다. 그만큼 ‘피’는 가장 고귀하고 성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북중관계를 얘기할 때 피로 맺어진 혈맹관계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렇다면 북중 혈맹관계는 어떻게 유래됐을까? 

첫 번째는 중국 공산당 정권이 1931년 장시성 루이진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수립하는 때부터 비롯됐는데 이때부터 조선인들은 피 흘려 중국을 지원했다. 일제가 동북 3성을 점령하자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장쉐량의 동북군은 총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때 지린성을 중심으로 조선인유격대가 일어나 중국인 의용군과 함께 3일간 피나는 혈투 끝에 일본군 천여명을 사살했다.

두 번째 단계는 중국 공산당이 1934년부터 1년간 산시성 옌안으로 대장정을 감행했던 기간이다. 이때 참가한 조선인 10명 중 9명은 죽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무정은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을 역임했다. 중국군도 10만명이 떠났지만 8천여명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세 번째 단계는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 최용건, 김책 등이 중국 인민의 해방을 도운 단계이다. 이 동북항일연군은 중국인과 조선인의 연합부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은 항일유격전쟁 중 일제 타도를 위해 선혈로 맺어져 있었다. 

네 번째 단계는 해방 후인 1946년 10월 말, 국민당군이 압록강변의 단동을 점령했던 이후 단계이다. 중국 측 자료에 의하면 2만명 내외의 부상병과 가족들이 단동의 맞은편 신의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전투요원과 부상병, 군인 가족들을 민가에 분산시키고, 중상자들은 병원에서 의료혜택을 받도록 했다. 1947~48년 두 해 동안 북한을 경유한 중국의 전략물자가 무려 52만톤이나 동북지방으로 도달했다. 또한 1946년 하반기에는 18개 부대가 북한을 경유해 동북으로 진입했고, 1947년에도 북한을 통해 동북근거지로 이동한 인원이 1만명을 웃돌았다. 상하이에 있던 중공 간부와 군 지휘관들도 북한이 내준 열차를 타고 랴오동 지역에 안착할 수 있었으며, 동북에 와있던 간부 가족들도 거의가 전쟁 기간 북한 땅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이처럼 조선인 항일운동가들은 피 흘려 마오쩌둥을 도와 중국의 탄생에 기여했고, 김일성도 마오쩌둥의 부탁은 모두 들어주었다. 요즈음 북한과 중국의 혈맹관계의 균열이 심화되고, 급기야 조중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도 깨질 수 있다는 분석도 눈에 띈다. 그러나 북중 혈맹관계가 그렇게 쉽게 와해될 것이라고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해 7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북한과는 선혈로 맺어진 관계이고, 한국과는 25년 전에 수교했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과거 김일성은 1956년 옛 소련의 후루시초프 격하운동을 보고 소련이 수정주의를 밟는다며 중국 편에 섰고, 1960년대 중반에는 중국이 교조주의에 빠졌다며 친소련정책을 폈던 사실을 볼 때 김정은도 그러한 등거리 외교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중국과 러시아도 북한을 자기편에 끌어들이는 것이 자국의 국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평가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정책변화를 예의 주시하면서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외교정책 개발에 주력해 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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