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밝은 밤 귀촉도 슬피 울 제 (月白夜蜀魂啾)
수심에 젖어 다락에 기대섰네 (含愁情依樓頭)
네가 슬피 우니 듣는 내가 괴롭구나 (爾啼悲我聞苦)
네가 울지 않으면 내 시름도 없으련만 (無爾聲無我愁)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부디 오르지 마소 (愼莫登春三月子規樓)

단종(1441∼1457)은 영월 관풍헌 매죽루에 올라 ‘자규사(子規詞)’를 읊었다. 자규는 두견새이다. 신하에게 쫓겨난 촉나라 임금 두우가 슬피 울며 죽어 새가 되었단다. ‘촉나라로 돌아가고 싶다’ 하여 귀촉도(歸蜀道)라고도 한다.  

1457년 6월에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의금부 도사 왕방연은 청령포에 단종을 두고 돌아오는 길에 이 시조를 지었다.    

단종은 청령포에 홍수가 나서 영월 객관인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관풍헌에서 단종은 누각에 자주 올라 칠언율시 ‘자규시’도 읊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을 나오니 
외로운 그림자마저 짝 잃고 푸른 산을 헤매네.
밤은 오는데 잠들 수가 없고
해가 바뀌어도 한은 끝없어라. 

새 울음소리 끊긴 새벽 산 위에는 지는 달이 희고 
피 흐르는 봄 골짜기엔 떨어진 꽃잎 붉겠구나.
하늘은 귀먹어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시름하는 이 몸의 귀만 어찌 이리 밝단 말인가. 

17세 나이에 부인 송씨와 생이별했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숙부 세조가 너무나 원망스러웠으리라. 

그런데 7월 3일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한다는 사실이 발각되자 세조는 10월 21일에 어린 조카에게 사약을 내렸다. 기구하게도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또 이르렀다. 

“그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니, 나장(羅將)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하는 수 없이 관풍헌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곤룡포를 입고 나와 까닭을 물었으나, 왕방연은 대답을 못했다. 

그런데 노산을 모시는 통인(通引)이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 문틈 뒤로 끈을 잡아당겨 단종을 죽였다. 통인은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했다. 시녀와 시종들은 다투어 동강에 몸을 던져 죽으니 시체가 강에 가득했고,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도 분별할 수 없었다.” (연려실기술, 단종조고사본말) 

하지만 1457년 10월 21일자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서 자살하자 예(禮)로써 장사지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40년 뒤에 사관 김일손(1464∼1498)은 사초(史草)에 ‘노산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3일)’고 직필했다. 결국 김일손은 무오사화로 능지처사 당했다. 

중종 때 문신 이자(1480∼1533)는 ‘음애일기’에서 ‘노산군이 자진(自盡)했다는 것은 당시 여우같은 무리들이 권세에 아첨하느라고 지은 것’이라고 평했다.   

한편 단종의 ‘자규사’ 등은 김시습, 조상치 등에 의해 후세에 전해졌고, 단종애사(端宗哀史)는 지금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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