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공손홍(公孫弘)은 산동성 치천(菑川) 출신으로 젊어서 고향 설현의 옥리가 됐다가 법을 어겨 파면됐다. 실직한 그는 바닷가에서 돼지를 키우면서 시경과 서경을 배워 이름을 날렸다. 동갑인 가의(賈誼)가 박사로 초빙했다. 1년 동안에 중대부로 승진했다. 문제는 형명학을 좋아했지만 가의의 건의로 유학자들을 임용하기 시작했다. 40여세의 공손홍은 고향으로 돌아가 춘추공양전을 익혔다. BC 140년, 한무제가 인재를 구할 때 60세인 공손홍은 치천의 현량으로 추천됐다. 조회에서 공손홍은 매번 찬반양론을 제시하여 무제가 선택하도록 유도하고 정면에서 논쟁하지 않았다. 유연한 그에 비해 급암(汲黯)은 꼬장꼬장했다. 공손홍은 늘 급암에게 먼저 말을 꺼내게 하고 나중에 찬성하여 충돌을 피했다. 공손홍은 검소했다. 급암은 요직에 있어서 봉록이 많은 공손홍이 검약을 내세워 명예를 낚는다고 비판했다. 공손홍은 곧바로 시인하고 급암을 칭찬했다. 무제는 공손홍이 넉넉하고 겸손하다고 생각하여 76세인 그를 승상으로 임명했다. 그의 재임기간은 무제의 전성기였다. 

공손홍은 승상부에 빈객들을 위한 집을 짓고 천하의 인재들과 국사를 상의했다. 몸소 절검을 실천하며 천하인의 모범이 됐다. 조악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봉록은 모두 친구와 빈객들을 위해 사용했기 때문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급암은 늘 무제의 앞에서 공손홍을 비난했다. 어지간한 공손홍도 급암에게 한을 품고 그를 귀척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보냈다. 대우 동중서(董仲舒)도 공손홍이 아부한다고 비난했다가 외직으로 쫓겨났다. 공양학가인 공손홍은 저작을 남기지 않았지만 주요사상은 현량대책에 반영돼 있다. 그의 사상적 최고 범주는 화(和)이다. 공손홍은 어떤 사물이든지 모두 대립적 측면이 있으며, 통일을 이룩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통일의 기반은 화로 태평성세를 이룩하는 길이다. 그는 화라는 정치철학에서 출발하여 무제의 극단적인 정치에 반대했다. 공손홍은 예의로 백성들을 복종하게 만들어야 하지만, 예의에 의지할 수 없으면 상벌이라도 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의와 법을 결합하여 법은 의와 멀지 않아야 하고, 화는 예와 멀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공손홍의 사상에는 법가적 요소가 상당히 포함돼 있었다.

무제는 대장군 위청과 승상 공손홍을 만날 때는 가끔 관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급암이 오면 반드시 관을 쓰고 만났다. 평소에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급암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급암은 천자의 꾸중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직언했다. 공손홍은 공경들과 상주할 사정과 관점을 약속하고도 막상 무제를 만나면 약속을 저버리고 무제의 뜻에 순종했다. 급암은 그러한 공손홍을 비난했다. 그러나 공손홍도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실제로도 고지식한 급암보다 유연한 공손홍의 정책적 건의가 더 많이 채택됐다. 무제는 상반적인 두 사람을 비교해가면서 정무적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승상이 된 후 공손홍은 승상부의 동쪽에 현사와 빈객을 대접하는 집을 지었다. 동각대현이라는 성어는 여기에서 비롯됐다. 후세에 인재를 아낀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개각(開閣)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공손홍은 3곳에 객관을 지었다. 흠현관(欽賢館)은 가장 현덕한 사람을 접대하는 것이었다. 시초관(翅楚館)은 가장 재능이 뛰어난 인재를 접대하는 곳이었다. 접사관(接士館)은 나라에서 재능이 있는 사람을 접대하는 곳이었다. 흠현관에서는 9경이나 장군 등 2천석 이상의 고관이 배출됐다. 고하(高賀)라는 옛 친구가 찾아왔다. 대접이 후하지 않다고 생각한 고하는 공손홍이 인색하다고 비난했다. 공손홍은 반갑지 않은 손님보다 옛 친구가 더 어렵다고 한탄했다. 진심을 알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숱한 비난과 오해에도 굴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한 공손홍도 난감할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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