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일본은 섬나라라는 지리적 원인과 지진을 비롯한 천재지변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생존공간에 대한 문제에 매우 민감했던 것 같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세계적인 근대화 궤도에 신속하게 진입하자 이러한 욕망도 날로 강렬하게 확장됐다. 욕망의 확장은 몇 가지 방면에서 두드러졌다. 첫째, 일본은 불안정한 생존공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대국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대국이 되려면 각종 자원과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해외 식민지의 확보와 유지에 대한 집착이 없이는 본토의 좁은 땅에서 간신히 생존할 수밖에 없었다. 영토확장을 위한 노력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집권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다. 둘째, 역사적으로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은 오랫동안 문명의 겨울잠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동면기에 일본인들은 생존공간의 확장이라는 자연적인 욕망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일찍이 조선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세 나라가 혼전을 펼치고 있었다. 약소국 신라가 굴기하여 중국의 당제국과 연합군을 결성하고 백제를 침공했다. 백제의 지원요청을 받은 일본은 해군을 조선에 파견했다. 663년, 신라와 당의 연합해군이 백강(白江) 입구에서 개화기에 지나지 않은 일본의 해군을 전멸시켰다. 16세기 말이 되자, 일본인의 생존공간을 확장하려는 욕망이 다시 팽창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전국시대를 마무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군사력을 믿고 조선에게 중국을 정복하는 길을 빌려달라는 글을 보냈다. 조선이 거절하자, 그는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중국은 조선을 돕기 위한 군대를 파병했다.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1598년 노량(露梁)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조선의 이순신(李舜臣)과 명의 등자룡(鄧子龍)이 지휘하는 연합군은 일본해군의 주력을 섬멸했다. 일본군은 완전히 본토로 철수했다. 이후 일본은 300년 동안 감히 해외를 넘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근대의 메이지 유신에 이르자, 일본인은 다시 세계를 향해 눈을 돌렸다. 국력이 신장하자 오랫동안 겨울잠에 빠져있던 팽창욕망도 깨어났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의 북양해군을 격파한 일본은 대마도해협에서 러시아의 극동함대마저 격파하고 태평양의 패자로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팽창야욕은 그들의 역사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더 나아간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목표를 수립했다. 918사변 이후 일본은 300년 전 히데요시가 세웠던 계획을 답습하여 아시아 대륙을 향해 본격적인 야욕을 펼치기 시작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에게 참패한 일본은 다시 본토로 돌아갔다. 일본사를 총괄해보면, 그들의 굴기는 모두 해군의 굴기와 유관하며, 쇠락은 모두 해군의 실패와 유관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강대하고 안전한 일본을 위해서는 반드시 강대한 해군에 의존해야 했다. 이것이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에 처한 일본의 오랜 역사적 전통이다.

프랑스 아날학파의 술어를 활용하면 이러한 일본의 침략야욕은 역사의 장기적 단계에 해당하는 요인이 조성한 결과이며, 페르낭 브로델의 관점에 따르면 인류는 장기적 단계의 요인이 주는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본인은 1200년 동안 확장욕망을 지속해왔다. 해군력의 강화는 국가의 흥망이 걸린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독도에 유난히 집착하는 것은 동해를 선점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기지 건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일본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 그들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공존이라는 인식이 없다. 남의 생존공간을 탈취하겠다는 일념은 변하지 않는다. 일본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 대미외교가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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