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장창수(張蒼水, 1620~1664)는 영파 출신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명은 쇠락하고 만주에서 세력을 키운 여진족이 요동에서 청을 세워 중원을 위협했다. 숭정17년(1644), 청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마사영(馬士英)이 신종의 손자 주유숭(朱由崧)을 황제로 추대했다. 당시 명군은 양자강 상류에 좌량옥(左良玉), 하류에 사가법(史可法)이 주둔했다. 그러나 명군은 자중지란으로 와해됐다. 사가법은 참혹하게 전사했다. 나중에 ‘명사’를 편찬한 청의 역사가조차 역대의 충신 가운데 사가법만큼 비참하게 죽은 사람은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장창수는 26세에 의연히 붓을 던지고 항청투쟁에 뛰어 들었다. 남경이 함락되자 장국유(張國維) 등이 소흥에서 주이해(朱以海)를 감국으로 추대하고, 정지룡(鄭芝龍)과 황도주(黃道周)가 복건에서 주율건(朱聿鍵)을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두 세력은 힘을 합치지 못하고 서로 충돌했다. 청군이 강남의 마지막 요새 전당을 돌파하자 장창수는 노왕을 따라갔다.

복건을 침입한 청군이 당왕을 사로잡았다. 당왕은 의연하게 항거하다가 죽었다. 정지룡은 청에 항복했지만 그의 아들 정성공은 하문을 근거지로 끝까지 항거했다. 장창수는 절동으로 돌아와 유격전을 펼쳤다. 명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대국적인 안목이 없어서 조금만 위기에서 벗어나면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장창수는 정성공과 연합하여 남경 일대에서 용맹을 떨쳤다. 정성공이 남경 함락에 실패하자 고립된 장창수는 포로가 되어 고향 영파로 압송됐다. 청의 영파제독 장걸(張杰)이 회유했지만, 장창수는 단호히 거절했다. 항주로 이송되자 절강총독 조정신(趙廷臣)이 다시 한 번 항복을 권유했다. 장창수가 거절하자 조정신은 풀어 줄 방법이 없어서 사실대로 조정에 보고했다. 청조정이 직접 회유했지만 끝까지 거절했다. 결국 사형이 확정됐다. 강희3년(1664) 9월 7일은 날씨가 좋았다. 새벽에 일어난 장창수는 악비(岳飛)의 만강홍(滿江紅) 가운데 두 수를 정성스럽게 베껴 옥중에서 같이 고생하던 나자목(羅子木)에게 주었다. 장창수는 조용히 붓을 놓고 일어나 단정히 건을 쓰고 형장으로 갔다. 형틀에 앉은 그는 멀리 봉황산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산색이 좋으니 죽기에 좋은 날이라고 말했다. 집행관이 절명시를 받아 적었다.

아년적오구(我年適五九) 복봉구월칠(復逢九月七) 
대하이부지(大厦已不支) 성인만사필(成仁萬事畢) 
내 나이는 마침 45세, 다시 또 9월 7일을 맞았네.
나라가 지탱하지 못하니, 인으로 만사를 마무리한다.

나자목과 양관옥(楊冠玉)도 함께 죽었다. 장창수는 26세에 붓을 던지고 군문에 들어가 절동에서 항청의군을 조직하여 여러 차례 청군을 괴롭혔다. 노왕을 따라 세 번이나 민으로 건너갔으며, 네 번이나 장강을 건너 30여개의 성을 수복했다. 무려 2천여리나 되는 먼 길을 잠행하면서 19년 동안 청과 싸우다가 45세에 치열한 삶을 마감했다. 장창수가 죽은 후 옛 친구 황종희(黃宗羲) 등이 그의 유골을 거두어 항주의 남병산 북쪽 기슭에 묻어 주었다. 청조의 잔혹한 통치가 이어지자 장창수의 묘는 봉분이 무너지고 묘비도 없어졌다. 그러나 장창수의 불굴의 정신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 깊이 남아 그의 묘 앞에는 늘 제사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한식에는 술과 간장을, 봄바람이 불 때는 종이로 만든 나비를, 제삿날에는 정성껏 차린 제수가 늘 마련됐고 묘소 옆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곡을 하고 지나갔다. 후세의 사람들은 장창수를 기념하여 그의 묘와 사당을 새로 짓고 사당 앞에는 남랭정(南冷亭)을 세웠다. 나라가 위험하거나 망하면 원인을 제공한 통치자들은 사라지고 무명의 영웅이 나타난다. 재야에 인재가 없는지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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