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은 태평천국의 유명한 군사 지도자이자 전략가였다. 청은 서구 자본주의의 침략으로 궤멸 직전에 이르렀다. 1842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정부는 남경조약을 체결하고 동남지역의 주요 항구들을 개방했으며 홍콩을 영국에게 할양했다. 이후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도 다투어 불평등조약을 강요했다. 태평천국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부패하고 무능한 청을 타도하고, 외세로부터 중국을 지킨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지도자 홍수전(洪秀全)은 향시에 불합격한 후 선교사의 전도를 듣고 예수의 동생이라고 자칭하며 고향에서 상제회(上帝會)를 조직했다. 기독교를 앞세웠지만, 홍수전 개인의 종교철학이 대부분이었다. 상제회는 남자는 형제, 여자는 자매라 불러 중국의 오랜 전통사상인 존비차등을 없애고 만민이 평등한 대동사회를 건설한다고 주창했다. 국호인 태평은 천하의 만민이 평등한 국가라는 뜻이다. 1850년, 홍수전은 반청복명이라는 오랫동안 잠재됐던 구호를 앞세워 군사를 일으켰다. 다급해진 청이 진압군을 파견했지만 기세를 막지 못했다.

태평군은 청군이 아니라 증국번(曾國藩)이 가로막았다. 한족의 국가를 세우겠다고 나선 태평군을 한족이자 사대부계급인 증국번이 가로막고 나선 원인은 무엇일까? 초기에 증국번은 엄정중립을 고수했다. 그러나 남경을 점령한 태평천국은 중국의 전통문화와 너무 동떨어진 신권적 통치를 강행했다. 보수적인 강남의 민중이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게다가 초기에 엄정하게 군기를 지켜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던 태평군이 수세에 몰리자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민중은 태평군에게 크게 기대했지만 홍수전의 남경정부는 봉건적 전제왕조의 통치자들이나 다름이 없는 행동을 보이자 크게 실망하고 증국번의 군대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100년 후에 정권을 장악한 공산당은 태평군을 공격한 증국번을 이민족의 앞잡이가 되어 농민기의군을 탄압한 원흉으로 매도했다. 그러나 증국번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태도는 개방 이후로 완전히 바뀌었다. 증국번은 대단한 경륜과 전략을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많은 인재를 양성한 사람으로 변했다. 중국의 서점에는 그에 관한 여러 종의 서적이 깔려있다. 매국노에서 최고의 스타로 재탄생한 것이다. 태평천국은 남경 점령 이후 내분으로 자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옥성(陳玉成)과 이수성의 눈부신 군사적 활약 덕분에 명맥을 유지했다. 남경에서 청군을 대파한 이수성은 강소와 강서성을 차지하며 기세를 올렸다. 항주는 그의 군사적, 정치적 근거지였다.

이수성이 세운 항주의 혁명정권은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농업생산과 빈민구제에 주력했다. 농민들은 스스로 군량미를 바쳤다. 항주지역의 반청감정을 감안하면 일방적인 수탈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시적이지만 이수성의 경제정책은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대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서양인들은 초기에 태평천국을 기독교 국가로 오인하여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태평군이 반외세정책을 펼치자 군대를 조직하여 이익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홍장(李鴻章)이 재빨리 미국인 프레드릭 워드가 지휘하는 양창대(洋槍隊)와 합작하여 상승군(常勝軍)을 조직했다. 좌종당(左宗棠)까지 가세하자 이수성은 항주에서 고립됐다. 결국 이수성의 태평군은 항주에서 철수했다. 상승군의 주력이던 프랑스인들이 항주에 진입하여 노략질을 했다. 항주인들은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충왕 이수성의 태평군은 2년 3개월의 짧은 기간 동인 항주를 다스렸지만 백성들과 호흡을 같이했다. 그가 심은 반봉건사상과 외국침략자들에 대한 민족, 민주사상은 민중들의 가슴속에 뿌리를 내렸다. 1864년, 이수성의 죽음과 함께 태평천국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훗날 그의 점령지역은 신해혁명의 기반이 됐다. 민족과 국가가 위기일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질적 측면이 아니라 역사의 혼을 심어야 한다.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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