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전제군주의 교과서라 해도 좋을 한비자(韓非子)에서는 유(儒)와 협(俠)을 통치의 위험요소로 생각했다. 유는 문장으로, 협은 무력으로 범법행위를 자행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의 건국 이후 유는 전제권력에 밀착했지만 협은 여전히 국가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무장 세력이었다. 그들은 부귀보다는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한 의리를 중시했다. 전제군주로서는 치안과 정권의 안정을 위해 이들을 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격적인 탄압은 무제시대에 시작됐다. 무제는 주보언의 건의로 호협들을 새로 조성한 신도시 무릉으로 이주시켰다. 호협의 우두머리가 지방에 모아 둔 재물은 대부분 중앙정부에서 회수했다. 무제의 강제적 이주로 가장 타격을 입은 호협은 관동 출신 곽해(郭解)였다. 사마천은 그의 인간성과 활약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곽해는 어린 시절에 도굴, 사전 주조를 비롯한 온갖 악행을 저질렀지만, 성장하면서 약자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소년들의 우상이 됐다. 소년들은 그의 원수를 갚고도 입을 닫았다. 곽해의 누이에게는 방자한 아들이 있었다. 그는 외삼촌의 명성을 믿고 행패를 부리다가 피살됐다. 곽해의 누이는 아들의 시신을 길거리에 방치하고 조카의 원수를 갚지 않는다고 욕을 퍼부었다. 조카를 죽인 사람은 곽해가 자신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찾아와 사실을 자백했다. 곽해가 조카의 잘못을 인정하자 그의 누이도 마지못해 아들의 장례를 치루지 않을 수 없었다. 낙양에 사는 사람들은 분쟁이 발생하면 두말 하지 않고 곽해의 중재를 받아들였다. 그는 항상 남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난했던 곽해는 강제이주대상이 아니었다. 곽해의 친구 대장군 위청(衛靑)까지 무제에게 곽해를 위해 변명했다. 무제는 위청까지 움직이는 곽해를 위험하게 생각했다. 곽해의 동향인 양계주(楊季主)의 아들은 그의 이주를 진행하다가 곽해의 조카에게 피살됐다. 곽해가 함곡관으로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얼마 후 곽해가 양계주를 죽였다. 양씨 집안에서 곽해를 고발했다. 그러나 고발한 사람을 누군가 죽였다. 화가 난 무제가 곽해를 체포하라고 명했다. 곽해는 도망쳤다. 도망을 도운 적소공(籍少公)은 자살하여 곽해를 보호했다. 어떤 유생은 곽해를 범법자라고 말했다가 또 누군가에게 피살됐다. 관리가 곽해를 추궁했지만 본인도 유생을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강제이주를 건의한 주보언처럼 곽해도 결국 공손홍의 건의로 일족과 함께 피살됐다. 사마천이 곽해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자신의 신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위대한 문인이기 전에 의를 중시하는 호협을 자처했다. 흉노와 싸우다가 고립되어 적에게 투항한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죽음보다 더한 궁형(宮刑)을 받은 것은 의협심 때문이다. 그의 친구마저 죽음을 거부하고 남자의 기능이 제거되는 형을 받아들인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대대로 이어진 사관으로서의 사명감을 지키는 것이 대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치욕을 참을 수 있었다. 사마천은 자신이 이릉의 무고함을 변호한 것처럼 누군가 나서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사마천이 유협열전을 지은 이유가 알량한 지식인들을 조롱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나는 필치로 써내려간 유협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러한 분석이야말로 사마천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는 생각이 든다. 학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객관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세상에 객관적인 사실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 학자들이라는 말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위대한 역사의 대가 사마천을 사사로운 감정을 복선에 깔고 서술했을 것이라는 자신의 옹졸함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협기가 사라진 역사야말로 볼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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