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에 남기다

김지헌(1956~  )

 

노을을 배경으로
강물과 모래사장에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맨 사내

태양이 다비식을 하는 동안
어떤 무연고 죽음이
조용히 입관되고 있다.

 

[시평] 

노을이 스러지는 장면은 장엄하다. 서쪽 하늘 모두를 물들이며 하루를 마감하는 그 장엄함은 마치 어떤 거룩한 의식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 의식은 무엇을 시작하는 의식이기보다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그래서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그러한 의식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의식, 그래서 더 거룩하고 장엄하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 거룩한 의식의 노을을 ‘태양의 다비식’이라고 이름하였다. 찬란한 빛과 함께 그 아침을 시작한 태양은 길고긴 하늘 길 여정에 올라 한낮의 뜨거움으로, 그 열정을 불태우기도 했지만, 하나씩 그 빛을 잃어버리고 이내 노을이라는 장엄한 이름으로 마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강물과 모래사장에 핏빛 붉디붉은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맨 사내 마냥, 그렇게 태양은 조용히 다비(茶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치 무연고의 죽음이 조용히 입관되듯이, 그렇게 태양은 노을이라는 한 장의 유서를 남기고 지구의 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스러져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 스러져가는 모든 것들은 이렇듯 장엄한 것인가.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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