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시(詩) ‘화살과 노래(THE ARROW AND THE SONG)’는 19세기를 살다 간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의 작품이다. 읽을 때마다 뭔가는 몽매(蒙昧)로부터 깨어나는 느낌을 받게 하며 그것을 새롭게, 새롭게 확인하게 해주는 시다. 비록 문구는 짧을지라도 감칠맛의 여운이 오래 가는 시다. 다시 읽어본다면 이렇다. 

‘나는 하늘에 대고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땅에 떨어졌지만 어딘지는 알 수 없었네; 왜냐하면 화살이 워낙 빨라 눈으로 볼 수가 없었지/ 나는 하늘에 대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땅에 떨어졌지만 어딘지는 알 수 없었네; 왜냐하면 누가 시력이 그렇게 예리하고 강해 날아가는 노래를 볼 수 있을 것인가?/ 세월이 오래 오래 흐른 뒤 나는 참나무에 박힌 그 화살을 발견했네, 그런데 그 화살은 부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지, 나는 노래도 찾았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친구의 가슴속에 내 노래가 있었지 않았겠나.(I shot an arrow into the air,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for so swiftly it flew, the sight, could not follow it in its flight/ I breathed a song into the air,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for who has sight, so keen and strong, that it can follow the flight of song?/ Long, long afterward, in an oak, I found the arrow, still unbroke, and the song, from beginning to end, I found again in the heart of a friend.)’

이 시의 의미에 공감한다면 사람의 말이나 행위는 그냥 공중에 흩어지고 마는 하얀 연기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 더구나 그 말과 행위의 주체가 결코 그것을 귀로 흘리거나 간과하고 말 수 없는 권능과 책임을 가진 사람들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우리 정치권에서 개헌(改憲) 얘기가 나온 것은 진즉 이 정권 집권 초기부터였지만 그것이 어디든 부딪쳐 반사될 곳이 없었던지 메아리조차 분명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주의 미아가 되어 되돌아오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음이 때가 되어 드러났다. 롱펠로가 읊었듯이 개헌론은 ‘참나무에 부러지지 않은 채 박혀 있던 화살이나 친구의 가슴속에 파고든 노래가 온전히 살아있었던 것’처럼 놀랍게도 개헌 발의권자인 대통령의 마음속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임기가 불과 1년 몇 달밖에 남지 않은 권력의 황혼녘에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개헌의지를 느닷없이 밝혔다. 개헌을 그의 임기 내에 완결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허공에 대고 돌아오지도 않을 개헌 화살을 쏘았거나 개헌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닌가했을 유력 정치인들이 반색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필 그것도 ‘경제를 살려야지 개헌은 무슨 개헌이냐’ 했던 완고한 입장의 대통령의 심장에 박혀 온전히 부러지지 않고 살아있었으니 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만도 했었다. 비유컨대 대통령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제에 쏟아야 할 국정 어젠다(agenda)의 초점이 흐려질 것을 우려해 개헌론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싸늘했었다. 마치 선(善)한 천사가 악의 편인 사탄(Satan)을 바라보듯이 했다고나 할까. 

그랬었지만 그때의 개헌론자들이 사탄이었다면 지금의 대통령 역시 그때의 그 사탄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됐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대통령이 개헌 열차에 편승하게 됐다면 그때의 그 사탄들이 주장했던 개헌론은 결코 사탄의 그른 주장이 아니라 정의롭고 정당한 주장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소 억지일진 모르지만 그때의 개헌론자들을 백안시하고 무안하게 했던 대통령의 입장은 ‘죄를 나무라는 사탄(Satan rebuking sin)’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는 도덕군자들의 신선놀음이 아니라 가장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품성을 가진 사람들이 벌이는 가장 복잡하고 첨예하며 풀기 어려운 플롯(plot)의 드라마다. 그렇기에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주의 주장에서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라도 자꾸 만나고 소통을 가져 교감을 나누어 가는 것에 있다. 그렇지 않고 그것을 게을리 하면 지금의 우리 형편과 같이 으레 정치는 불통과 증오, 대결의 늪에 빠져 볼품없는 3류 드라마가 되기 쉽다. 뿐만 아니라 제도화되고 공개된 소통에 의존하지 않는 정치는 이른바 비선실세(秘線實勢)가 권력 행사의 과정에 음습하게 기생해 국정을 농단하는 권력의 사유화 현상이 벌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때마침 유령(phantom)이나 허깨비와 같은 것으로만 알았던 비선실세의 스캔들이 민낯을 드러내었다. 이 일로 그것을 강하게 부인하던 대통령이 마지못해 국민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등 집권 말기 대통령의 모습과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 이래서 소통은 꼭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소통은 말하자면 국정의 일탈을 막아주는 탈선방지턱 역할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소통이 부족하다고 원성을 사던 대통령이 느닷없이 개헌 의지를 피력하고 나오자 정치권과 많은 국민들이 그 배경에 의혹을 던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대통령이 대국민사과를 하기 전에 이미 그의 발목을 휘감고 있던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스캔들의 진상을 귀 밝고 눈 밝은 사람들이 매체들의 보도와 목격자들의 입소문으로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봐지기 때문이다. 이에서 보듯이 국민은 결코 바보일 수가 없다. 한 사람은 영원히 속일 수 있고 몇 사람은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많은 사람은 아예 속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떻든 개헌은 정치인들의 야망이기도 하지만 국민의 여망이기도 하다. 국민의 여망이 있기에 정치인들은 그들의 야망 달성을 위해 그것을 핑계 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5년 단임의 제왕적 대통령제로는 국정의 연속성과 안정을 이룰 수 없으며 책임정치의 구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명백하다. 다만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야심가들의 한풀이로는 모자람이 없을 것이지만 헌법이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이지 정치인들을 위해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의 개헌 의지의 배경이 의혹을 사는 상황에서 개헌의 추동력이 과연 유지될 수 있는 것인가에 있다. 그럼 물 건너 갔나. 그럴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국민의 여망이 불씨처럼 남아 있는 형편이어서 혹여 이루어질 개헌이라면 정치인의 야심이 아니라 국민의 여망을 담은 새 헌법이 나와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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