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희궁 뒷편 언덕에서 바라본 경희궁 전경. 멀리 고층빌딩이 빼곡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낮은 담장 너머로 전각들이 살포시 얼굴을 내민다. 겹겹이 쌓인 기와, 닿을 듯 말 듯 한 처마 끝은 마치 서로서로 챙겨주듯 포근했다.

도심 속 자그마한 궁궐인 ‘경희궁(慶熙宮)’. 서궐도(西闕圖) 속 옛 모습은 아니었지만, 전각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경희궁은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가장 규모가 작다.

광해군 때 창건됐으며, 서쪽에 위치해 서궐(西闕)이라 불렀다. 원래 명칭은 ‘경덕궁’이다. 경희궁으로 개칭된 건 1760년(영조 36)이다. 영조가 장릉(章陵) 곧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시호(諡號)와 같아 이를 피하고자 이름을 바꿨다.

인조(제16대 왕) 이후 철종(제25대 왕)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이 이곳에 임어(臨御)했다. 정조(제22대 왕)는 세손 시절 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경희궁에서 받기도 했다.

이처럼 경희궁은 조선 중·후기 궁궐로 많은 역할을 했다. 그러다 고종 때 임진왜란으로 불탔던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창덕궁과 창경궁이 이궁이 된다. 경희궁은 관청에서 필요한 창고나 기타 용도로 쓰이게 된다.

일제강점기 때, 고종이 강제적으로 순종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경운궁에 유배되는데 이때부터 경희궁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다. 일제는 경희궁 터에 조선 내 일본인을 위한 ‘경성중학교’를 짓는다. 또 숭정전, 홍화문 등이 외부에 매각·이전된다. 그러면서 경희궁의 옛 모습은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1988년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복원공사를 거쳐 현재의 경희궁이 잠에서 깨어난다. 조선중·후기의 역사를 증명하는 경희궁, 그 문을 열어보자.

▲ 경희궁 대문인 흥화문. 외딴곳에 덩그러니 서 있어 외로워 보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자리 잃은 ‘흥화문’과 ‘금천교’

경희궁 대문인 흥화문. 외딴곳에 덩그러니 서 있어서인지 쓸쓸해보였다. 이유는 이렇다. 1932년 일제는 ‘박문사’라는 절을 짓는데, 이곳의 정문으로 홍화문을 팔아버린다.

광복 후 장충동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 1988년 현재의 경희궁 터로 옮겨진다. 원래 위치는 구세군회관 자리다. 하지만 흥화문이 잠시자리를 비운 사이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들어선다. 결국 흥화문은 제자리를 내주게 된다.

덕분에 ‘금천교’도 홀로 떨어져 있다. 궐담이 사라져버린 탓에, 경희궁의 금천교는 궁궐이 아닌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복원됐다. 하루에 수많은 사람이 이 다리를 건넌다. 하지만 이곳이 금천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싶다.

▲ 경희궁 정전인 숭정전. 이중월대(二重月臺) 위에 웅장하게 서있는 숭정전은 국왕이 신하와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치러진 곳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숭정문’과 ‘숭정전’

‘정조 이산, 드디어 왕위에 오르다.’

1776년 3월 10일, 역사가 새로 쓰였다. 정조 이산은 숭정문에서 왕위에 등극했다. 정조는 자신의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어와 왕이 됐다.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어서다. 지난 15년간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이름은 금기시됐다.

하지만 이날 정조는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근본이 아버지 사도세자임을 분명히 언급한다.

경종(제20대 왕)과 헌종(제24대 왕)도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치른 후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에 올랐다.

이중월대(二重月臺) 위에 웅장하게 서있는 숭정전은 국왕이 신하와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치러진 곳이다. 다른 궁궐의 정전처럼 넓은 마당에는 품계석이 늘어서 있다.

숭정전 안 가운데는 ‘어좌(御座)’가 있고, 어좌 뒤에는 ‘일월오봉도’가 놓여 있다. 현재 서울에는 숭정전이 두 개 있다. 한곳은 새로 복원된 숭정전이요, 다른 한 곳은 현재 동국대학교의 정각원 건물로 사용되는 옛 숭정전이다. 복원공사 당시 숭정전을 원래 위치에 옮기려 했으나, 건물이 너무 낡아 새로 복원했다.

숙종 모신 빈전 ‘자정전’ 경희궁은 인왕산 자락의 경사진 언덕 지형을 그대로 사용해 뒤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진다.

숭정전 뒤편 자정전(資政殿)에 오르는 계단 하나의 높이도 20㎝나 된다. 원래 자정전은 편전으로, 임금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했다. 숙종이 승하했을 때는 빈전(죽은 왕실가족의 관을 발인 때까지 안치하던 곳)으로 사용됐다.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가 임시로 보관되기도 했다. 현재 자정전 안은 텅 비었다. 그래서인지, 냉랭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자정전 서쪽에는 발굴된 옛 전돌이 보존돼 있다. 400년의 긴 세월, 그 역사를 대신 속삭이는 듯 했다.

▲ 경희궁 태령전 옆 ‘서암(瑞巖)’. 원래 이름은 왕의 바위인 ‘왕암(王巖)’이었다. 광해군 때 왕의 기운이 서린 것으로 판단, 이곳에 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서암 아래는 샘이 솟아나는 암천이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기이한 바위 ‘서암’ 그리고 태령전

경희궁에는 다른 궁에서 볼 수 없는 기이한 바위가 있다. 태령전(泰寧殿) 뒤편의 거대한 암반으로 ‘서암(瑞巖)’이라 부른다. 원래 이름은 왕의 바위인 ‘왕암(王巖)’이었다. 광해군 때 왕의 기운이 서린 것으로 판단, 이곳에 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서암 아래는 샘이 솟아나는 암천이 있다.

숙종이 1708년 왕암을 서암으로 고치고 직접 ‘瑞巖’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사방석에 새겨 두게 했지만, 현재 찾아볼 수 없다.

태령전에는 서암을 자주 찾았던 영조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셨다. 원래 이곳은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 않았던 곳이다. 그러다 영조가 친히 아 바위 앞에 위치해 태령전에 영조의 어진을 모셨다.

경희궁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태령전과 서암에서 뒤돌아서니 멀리 고층 빌딩이 빽빽했다. 서궐도 속의 옛 경희궁은 어디로 간 걸까. 이젠 볼 수 없는 걸까. 유난히 가슴이 아리는 날이었다. 

▲ 낮은 담장 너머로 전각들이 살포시 얼굴을 내민다. 겹겹이 쌓인 기와, 닿 을 듯 말 듯 한 처마 끝은 마치 서로서로 챙겨주듯 포근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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