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자宮] ③아름다움과 아픔 간직한 궁궐 ‘창경궁’
[가보자宮] ③아름다움과 아픔 간직한 궁궐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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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시간이 멈춘 듯했다. 색이 바랜 창경궁(昌慶宮)의 전각들은 고풍스러움까지 더했다. 조선왕조의 향기가 궁궐 곳곳에 그대로 묻어 있었다.

창경궁은 1483년(성종 14년) 창건됐다.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했다. 하지만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걸 더 좋아했다. 창덕궁에 왕실가족이 늘어나면서 공간이 비좁아진다.

이때 성종은 왕실 웃어른인 정희왕후, 안순왕후, 소혜왕후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마련한다. 효심 가득한 아름다운 궁인 셈이다.

창경궁은 다른 궁보다 아픔이 많다. 임진왜란 때 전각이 모두 소실되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된다. 이후 몇 차례 화재가 났다. 무엇보다 순종 즉위 후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된다. 궁 안의 전각이 헐리는가 하면 동물원과 식물원이 설치된다.

특히 일제는 1911년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킨다. 일본은 궁궐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나, 우리 문화를 없애려는 정책 중 하나였다. 또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해 도로를 닦았으며, 궁 안에 일본인이 좋아하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었다.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관광시설로 이용되다 1983년 7월부터 복원공사를 시작, 같은 해 12월 창경궁으로 원래 명칭을 환원한다. 눈물과 설움이 그대로 담겨있는 창경궁, 그 길을 거닐어 보자.

▲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옥천교(玉川橋)’가 나온다. 옥천교는 현재 남은 다섯 궁궐 중 유일하게 자연수가 흐른다. 옥천교 앞으로 명정문이 보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가장 오래된 정전 ‘명정전’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옥천교(玉川橋)’가 나온다. 옥천교는 현재 남은 다섯 궁궐 중 유일하게 자연수가 흐른다.

옥천교 앞 명정문을 지나면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明政殿)’이 나온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단층 지붕에 아담한 규모지만, 궁궐 정전 중 가장 오래됐다. 즉위식, 과거시험, 궁중 연회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명정전 내부 가운데는 왕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다. 뒤편에는 천지인(天地人) 사상이 담긴 ‘일월오봉도’가 있다.

특히 천장에는 한 쌍의 봉황(鳳凰)이 있다. 봉황은 예로부터 상상의 동물로,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 하였으며, 새 중에 ‘가장 신령스러운 새’로 알려졌다. 봉황은 고귀함과 존엄, 길조와 상서로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당나라 때 대문장가인 한유(韓愈)의 송하견서(送何堅序)에는 “내가 듣기로 새 중에 봉이라는 것이 있는데, 항상 도(道)가 있는 나라에 출현한다(吾聞鳥有鳳者 恒出於有道之國)”라고 기록했다. 선조들은 영원한 ‘군자의 나라’가 펼쳐지길 바랐던 건 아닐까.

또한 명정전 기둥은 원형 모양이다. 선조들은 동그라미를 하늘, 네모를 땅이라 여겼다. 곧 왕이 있는 곳이 하늘임을 보여준 것이다.

뒤주 속 사도세자 최후 ‘문정전’

“아바마마, 살려주시옵소서!”

문정전은 왕의 집무실이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1762년 정조(제22대 왕)의 친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곳이다. 건강 상 영조(제21대 왕)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은 노론을 싫어하던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했다. 결국,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게 된다.

250여년전, 아버지를 향해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도세자의 절규와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린 정조의 읍소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 소혜왕후 한씨, 인현왕후 등 여성의 자취가 남아있는 ‘경춘전’ ⓒ천지일보(뉴스천지)

남녀유별 ‘환경전’ ‘경춘전’

환경전은 왕이나 왕세자가 기거했던 곳으로, 남성이 사용했다. 특히 환경전은 의녀 대장금이 중종(제11대 왕)을 치료했던 곳이다. 대신들은 어의가 아닌 의녀가 임금의 주치의가 된 것에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중종은 어의보다 대장금을 더 신뢰했고, 마지막까지 대장금에게 진료를 맡겼다.

인조(제16대 왕)의 장남인 ‘소현세자’도 이곳을 사용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간 소현세자는 9년 만에 이곳 환경전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두 달 만에 숨을 거뒀다. 그의 죽음은 아직도 의문투성이다.

경춘전에서 제일 먼저 생활했던 여인은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다. 훗날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비(인수대비)가 된다. 장희빈과 함께 사극의 단골 인물로 등장하는 인현왕후도 경춘전에서 거처했다.

혜경궁 홍씨도 남편인 사도세자가 죽는 비극을 겪은 뒤 경춘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처럼 경춘전은 여성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 창경궁 내 연못인 춘당지. 이곳에는 ‘내농포’라 하여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 시범을 보이던 논이 있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일제 흔적 남은 ‘춘당지’ ‘대온실’

창경궁 내 연못인 춘당지. 본래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창덕궁)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지금의 소춘당지)이었다. 지금의 춘당지는 ‘내농포’라 하여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 시범을 보이던 논이 있었다.

임금은 이곳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보며 백성들의 희로애락을 느끼며 풍년을 기원했다. 이 같은 왕실의 모습을 보고 백성은 나라의 어버이로 왕실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하지만 일제가 이를 파헤쳐서 큰 연못을 만들었다. 광복 후 전통 양식의 연못으로 새롭게 조성해 오늘날의 춘당지가 된다.

▲ 일제가 창경궁에 동·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가장 먼저 건립된 ‘대온실’. ⓒ천지일보(뉴스천지)

춘당지 뒤에는 일제의 잔재인 ‘대온실’이 있다. 일제가 창경궁에 동·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가장 먼저 건립된 건물이다. 당시 일제는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시킨 뒤 왕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이곳을 지었다.

이렇듯 창경궁 곳곳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깊은 상처가 남아있었다. 그 상처를 대신 감싸주듯 푸릇한 나뭇잎은 유난히 햇살에 반짝거렸다. 창경궁의 깊어진 여름, 이내 가슴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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