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1970년대 쓴 작품 노트 80권에 담겨

역사의식‧애틋한 사랑‧전쟁의 참혹함 등

기존 시풍과 다른 작품 多… 전집 발간 예정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으로 손꼽히는 박목월(1915~1978)의 미발표 시 290편이 고인이 남긴 노트들에서 발견됐다.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으로 손꼽히는 박목월(1915~1978)의 미발표 시 290편이 고인이 남긴 노트들에서 발견됐다.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길/남도 삼백리//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청록파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목월의 초기작으로 1946년 박두진, 조지훈과 함께 펴낸 ‘청록집’에 수록된 ‘나그네’라는 시다. 조지훈 시인의 ‘완화삼’에 화답한 시로 알려져 있으며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박목월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시 ‘나그네’는 시인 특유의 향토적이고 한국적인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으로 손꼽히는 박목월(1915~1978)의 미발표 시 290편이 고인이 남긴 노트들에서 발견됐다.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는 지난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 시인의 장남 박동규(85)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가 자택에 소장한 노트 62권과 경북 경주 동리목월문학관에서 보관 중인 18권의 노트에 담긴 박 시인의 미발표 육필 시들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시들은 시인이 1930년대 후반부터 말년인 1970년대까지 쓴 총 318편 중 기존에 발표된 시들을 제외한 290편으로 이 중에서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 166편만 추린 것이다.

박동규 교수는 “아버님이 남긴 노트들은 어머니가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관리하셨고 어머님 사후 오랫동안 보자기에 싸인 채 보관돼 왔던 것들”이라며 “오랜 시간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후배와 제자들의 도움으로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목월 시인의 아내 고(故) 유익순 여사(1920∼1997)는 남편이 습작하다 휴지통에 버린 메모까지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박 교수는 “6.25전쟁 당시 북한군 치하의 서울에 남아 있을 때도 어머니는 천장과 지붕에 아버지의 노트를 숨기며 이 노트들을 지켜왔다”고 회고했다. 이후 이 노트들은 박 교수가 보관하다 연구자들의 설득으로 시인 사후 46년 만에 공개됐다.

박목월 시인의 육필 시 노트를 공개하는 박동규 교수
박목월 시인의 육필 시 노트를 공개하는 박동규 교수

◆46년 만에 공개된 시

이번에 박목월 시인의 미발표 육필 시가 공개되면서 시인의 시풍을 한 가지로만 분류해서는 안 되며, 박 시인의 문학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유작품발간위 위원장인 우정권 단국대 국문과 교수는 “(이번 육필시 공개로) 박목월 선생의 가치를 다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 문학사 다시 써야 할 정도”라며 “미발표작을 중심으로 향후 박 시인의 전집을 발간할 것”이라고 말했다.

“6.25때/엄마 아빠가 다 돌아가신/슈샨보이./길모퉁이의 구두를 닦는 슈샨·보이.//(중략) 이밤에 어디서 자나 슈샨·보이/비가 오는데, 잠자리나 마련 했을가. 슈샨·보이/누구가 학교를 보내주는 분이 없을가. 슈샨·보이/아아 눈이 동그랗게 아름다운 그애 슈샨 보이/학교 길에 내일도 만날가 그애 슈샨보이.”

박목월 시인이 말년인 1970년대에 쓴 ‘슈샨보오이’라는 시의 일부로 슈샨보이 또는 슈샨보오이는 구두닦이 소년(shoeshine boy)을 뜻한다. 6.25한국전쟁의 참혹한 경험을 뒤로 하고 새 삶을 일궈가는 구두닦이 소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기존 그의 시풍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은…//참된 시인. 참된 시인이//되어보리라. 이 어리고 측은한//소망을//만인의 가슴에 꿈을 나누고//위안을 베풀고//그 가슴을 내 가슴처럼 드나드는.(박목월 육필시 중 ‘무제’)”

이 시대의 지성인으로서 참된 시인이 되겠다는 작가의 간절한 소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역시 서정적이며 자연친화적인 작품을 주로 썼던 그의 기존 시풍과는 다른 느낌이다. 이렇듯 이번에 공개된 시들은 주제별로 생활과 일상, 기독교 신앙, 가족과 어머니, 사랑, 제주와 경주, 동심, 시인으로서의 삶과 내면을 다룬 시들이 두루 포진해 있다. 여기에는 동시 60~70여편도 포함돼 있다.

박목월·조지훈·박두진의 '청록집' ⓒ천지일보 2024.03.18.
박목월·조지훈·박두진의 '청록집' ⓒ천지일보 2024.03.18.

◆청록파 시인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는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은 1939년 잡지 ‘문장’을 통해 시인 정지용의 추천으로 함께 등장했다. 이들은 시를 표현할 때 자연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운율 감각을 써서 ‘자연파’ 또는 ‘청록파’라 부르는 시파를 이뤘다.

이 세 명의 시인은 해방 이후인 1946년 자신들의 시를 모아 을유문화사에서 ‘청록집’이라는 시집을 펴냈는데, 바로 이 시집의 이름을 따서 이들을 ‘청록파’로 불렀다. ‘청록집’은 박목월 시인의 시 ‘청노루’에서 따왔다.

‘청록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광복 직전의 일제강점기 하에 쓰인 것으로 시사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중 박목월의 향토적 서정에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의식이 살아 있으며,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말기 한국인의 정신적 동질성을 통합하려고 한 가치를 인정받는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행해진 국어말살정책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말로 펴낸 이 시집은 민족의 역사적‧문화적 동질성을 드높인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또한 청록파 시인들은 일제강점기 문학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사회주의 문학에 반발해 한국 시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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