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숙종의 왕비는 4명이었다.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는 세상을 뜨고 1681(숙종 7)년에 경릉(추존 덕종) 근처의 '익릉'에 자리 잡았다. 13살에 왕비가 되어 후사도 없이 19살에 세상을 떴고 나홀로 능에 묻혔다. 후궁으로써 첫 왕자를 낳고 왕비에 올랐던 장희빈의 묘도 주변에 자리했다.

첫 왕비 인경왕후와 마지막 왕비 인원왕후는 비교적 평안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두 번째 부인 인현왕후와 세 번째 왕비였던 희빈장씨는 정치의 영향을 받아 왕비 책봉과 폐비가 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결국 두명은 숙종과 명릉에 자리했고, 인경왕후와 희빈은 '익릉'과 '대빈묘'에 따로 나홀로 자리했다. 숙종은 이처럼 다난한 가정사와 더불어 조정의 분열, 도적의 출현, 천재지변의 난관을 헤쳐 나가야 했다. 익릉과 대빈묘를 찾으며 숙종의 흔적을 살펴본다.

◆환국에도 불구 여러 업적 남겨

숙종이 27세에 이르도록 후사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1688(숙종 14)년 10월 27일 소의 장씨(뒤의 희빈 장씨)가 왕자(뒤의 경종)를 출산했다. 이듬해 기사년 1월 소의 장씨는 희빈에 봉해졌고 서둘러 왕자를 원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서인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왕비가 젊다는 이유였지만, 내심은 희빈 장씨가 남인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정면으로 반대했다. 숙종은 바로 송시열의 관직을 삭탈하고 지방으로 쫓아버렸다. 이이·성혼은 출향(문묘에서 축출함)됐고 6월 송시열은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압송 길에 정읍에서 사사됐다. 서인의 주요 인물인 영의정 김익훈과 김수항은 처형됐고 남구만은 유배됐다. 처벌된 남인의 관작이 회복됐다. 숙종은 중전 민씨를 서인으로 폐출했고 1690년 10월 희빈 장씨를 왕비에 책봉했다.   

제 19대 왕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의 능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12.
제19대 왕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의 능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12.

불과 4년이 지나 1694(숙종 20)년 갑술년 인현왕후를 복위하는 과정에서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당시 숙원 최씨(훗날 숙빈)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1694(숙종 20)년 3월 유학 김인과 서리 박귀근 등은 왕비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숙의 최씨를 독살하려했다고 고변했다. 4월에 김익훈·김석주·송시열 등이 복관되고 6월에 이이와 성혼은 다시 문묘에 종사됐다. 영의정 권대운 등 남인은 쫓겨나거나 처벌됐다. 또한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고, 민씨가 다시 왕비로 복귀했다. 9월 숙의 최씨가 왕자(훗날 영조)를 낳았다. 7년 후 1701(숙종 27)년 8월 인현왕후가 승하했다. 그런데 그간 희빈 장씨와 그 일가가 주술로 왕비를 저주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무고의 옥’으로 불리는데 10월 장씨는 사사되고 한 달 후 오빠 장희재도 처형됐다. 그러나 장씨의 아들 경종이 즉위하나 장씨는 1722(경종 2)년에 옥산부대빈으로 추존되고, 묘소는 대빈묘라 했다. 영조 대에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을 궁으로, 묘를 원으로 하는 궁원제를 실시했으나 옥산부대빈은 제외됐다.

환국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여러 업적을 남겼다. 대동법을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확대했고, 강원도와 삼남 지방의 양전(과세 대상인 토지를 조사·측량해 작황을 파악)을 실시해 전국 대부분의 토지를 측량했다. 1678(숙종 4)년 1월부터 상평통보가 유통됐다. 군사제도를 바꿔 1682년 훈련별대와 정초청(인조 때 설치한 기병과 보병부대)을 통합해 금위영(수도방위군)을 신설, 오군영 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군포균역절목을 마련해 1~4필의 양정의 군포를 2필로 균일화했으며 북한산성을 개축해 도성 방어를 강화했다.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고 왜관무역에서 사용하는 왜은(倭銀)의 조례를 확정했으며 특히 1693년 안용복을 시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점을 일본에게 확인시켰다. 1696년에는 독도에 들어온 일본인을 추방하기도 했다. 명의 은혜를 갚고자 대보단을 창덕궁에 설치하고 과거 피해자를 신원했는데 1698년 노산군의 묘호를 단종으로 추봉했고 단종을 섬겼던 영월을 부로 승격했으며 무덤을 장릉으로 봉했다. 1704년 ‘노산군일기’를 ‘단종대왕 실록’으로 고쳤다. 1718년에는 사사당한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의 위호를 회복시켜 주기도 했다. 숙종 때 서원 300여개가 신설되고 131개가 사액(임금이 이름을 내리는 편액, 즉 현판)됐는데, 이는 지방의 학문배양에 기여했으나 당쟁과 특권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익릉의 정자각 정전 양옆에는 별도로 세운 기둥인 ‘익랑(翼廊)’이 있다. 익릉 외에 숭릉, 휘릉, 의릉의 정자각에도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12.
익릉의 정자각 정전 양옆에는 별도로 세운 기둥인 ‘익랑(翼廊)’이 있다. 익릉 외에 숭릉, 휘릉, 의릉의 정자각에도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12.

◆왕위를 내려놓으려 했던 숙종

1692(숙종 18)년 12월 13일 숙종은 대신과 재상들을 접하며 도둑의 괴수 장길산을 놓친 고을 현감을 죄주게 했다. 실록은 “장길산이 평안도 양덕에 숨어 있으므로, 포도청에서 장교를 보내 덮쳐잡도록 했으나 놓쳤다. 고을 현감을 죄주어 경계토록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고 했다. 1697년 1월 임금이 하교하기를 “세력이 강한 도적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지역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에서 포위하였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음흉함을 알 만하다. 상세하게 정탐하고, 별도의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도록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나 장길산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영조대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홍길동(연산군), 임꺽정(명종)과 더불어 장길산(숙종)을 3대 도적이라 했다.

불과 14살의 나이에 왕이 된 숙종에게는 3번의 환국, 왕비가 교체되고 부인과 송시열 등 중요인물을 죽음에 처해야 했다. 또한 도적의 출현과 전국적인 기근이 성했으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게다가 파벌정치는 숙종을 힘들게 했다.

1705(숙종 31)년 숙종은 건강의 이유로 선위의 뜻을 밝혔다. 세자가 울면서 거두어 줄 것을 요청하니 숙종은 “소의 말은 비록 간절하나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단연코 윤허할 리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으나 조정이 모두 나서서 만류하고 109인의 대소신료들이 극구 반대하니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1709년 1월 숙종은 노론과 소론 양당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1709(숙종 35)년 1월 27일 숙종은 신하들과 의견을 나누는데 이르기를 “내가 요즘 일로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하노라. 지금 ‘노소(老少)’라고 하는데 ‘노’는 완화하고 후덕하며 ‘소’는 준엄하고 격렬해야 하나 그들은 그렇지 않다. 소론은 보합을 명분 삼고 노론은 오로지 비방 헐뜯기를 일삼고 있다. (중략) 내가 진실로 개탄스럽다”고 했다.

익릉 석호와 석호의 얼굴이다. 왕릉에는 석호와 석양 두 쌍이 있다. 원에는 각 한 쌍을 두지만 묘에는 두지 않는다. 석호는 봉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제공: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12.
익릉 석호와 석호의 얼굴이다. 왕릉에는 석호와 석양 두 쌍이 있다. 원에는 각 한 쌍을 두지만 묘에는 두지 않는다. 석호는 봉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제공: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12.

◆염병에 백성 죽고, 왕도 병으로 쓰러져

숙종 중반에는 기근이 심했다. 현종 대에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온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 참혹한 일들이 벌여졌다. 이는 숙종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1695(숙종 21)년 을해년과 이듬해인 병자년에 집중된 ‘을병기근’은 1699년까지 5년간 기승을 부렸다. 1695(숙종 21)년 8월 30일 실록은 “이때가 바로 추수의 시기가 되었으나 쌀 한 말 값이 50전이 되었으며, 이듬해 1696년 봄에 이르러 2백전이나 되었다”고 했다. 전국적으로 우박, 서리, 광풍, 지진과 폭우가 닥쳤으니 식량은 부족하고 고을의 나무가 뿌리 채 뽑혀지고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1699(숙종 25)년 11월 16일 실록은 “처음 병자년(1696년) 흉년 때문에 호적을 만들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비로소 완성하였다. 전국 호수가 129만 3083가구이고 인구가 577만 2300명이었는데, 1693년(계유년)에 비해 호수는 25만 3391가구가 감소하고 인구는 141만 6274명이 줄었으니 1695년(을해년) 이후의 기근과 전염병이 참혹했기에 이 지경이 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익릉 석호와 석호의 얼굴이다. 왕릉에는 석호와 석양 두 쌍이 있다. 원에는 각 한 쌍을 두지만 묘에는 두지 않는다. 석호는 봉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12.
익릉 석호와 석호의 얼굴이다. 왕릉에는 석호와 석양 두 쌍이 있다. 원에는 각 한 쌍을 두지만 묘에는 두지 않는다. 석호는 봉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12.

숙종 말기에도 기근은 성행했다. 1719년 1월 2일과 18일 보고는 “충청도의 각 고을에 염병으로 사망이 240명, 평안도 1904명, 전라도 2101명, 경기도 869명, 황해도 378명이라 하였다. 한성에서는 온 가구가 죽은 집이 1500호가 넘는다”고 했다.

이때는 숙종도 병이 악화돼 정사를 돌보기 힘든 시기였다. 1719(숙종 45)년 1월 14일 숙종의 진찰을 마치자, 도제조 이이명이 말하기를 “오늘 조정회의는 주상의 증세가 매우 위중하니 거행하기 어렵겠습니다. 청컨대 늦추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허락했다. 인하여 이후로 대소사를 여러 승지들이 동궁(세자)에게 품의하여 결정토록 했다. 이후 숙종의 건강이 나쁘니 세자가 조정 일을 보았다.

건강은 계속 악화됐다. 1720(숙종 45)년 6월 8일 실록은 “여러 신하 모두 조용히 엎드려 있었는데, 임금이 호흡과 가래 끊는 소리가 가늘어지다가 갑자기 크게 토한 뒤 숨을 멈추었다. 이때가 오전 8시 반이었다”고 했다. 왕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각방에서 울부짖고 곡하며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니 연잉군(영조)이 막자 환시가 정돈하였다. 인원왕후가 “왕께서 초상은 중궁이 주관하라”는 뜻을 밝혔음을 전교하였는데 왕세자(경종)가 아닌 연잉군이 이 하교를 받아 전했다.

대빈묘의 표석에는 ‘유명조선국옥산부대빈장씨지묘’라고 적혀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12.
대빈묘의 표석에는 ‘유명조선국옥산부대빈장씨지묘’라고 적혀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12.
대빈묘 문석인이다. 능과 원에는 문석인과 석마가 한쌍, 묘에는 문석인 한쌍 만이 설치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12.
대빈묘 문석인이다. 능과 원에는 문석인과 석마가 한쌍, 묘에는 문석인 한쌍 만이 설치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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