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의릉’
제20대 왕 경종ᆞ, 선의왕후의 능

어머니의 비극을 안고 성장해
후궁 아들로 최초 원자에 책봉
이복동생에 치이는 힘 없는 왕
왕 부부 6년 간격 모두 세상 떠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조선 왕릉에서 가을 정취가 아름다운 능의 하나가 바로 ‘의릉’이다. 서울 성북구 의릉은 경종과 선의왕후가 잠든 곳으로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처럼 왕과 왕후의 봉분이 위아래에 자리한 동원상하릉이다. 경종은 후궁-왕비-폐비-사사에 이르는 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옥산부대빈 장씨, 즉 장희빈(이름은 장옥정)의 아들 아닌가. 단종, 인종과 더불어 조선왕으로서 가장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았다. 부모도 부인도 힘이 되어주지 못했고 자식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내쳐져 목숨을 끊어야 했고 부인 둘은 20대에 일찍 죽었으며 후궁조차 한 명 없었다.

경종 자신도 우여곡절 끝에 33세 늦은 나이에 왕이 되었으나 힘이 없었고 어머니를 복위시키지도 못했다. 파벌 사이에서 꿈조차 펴지 못하고 4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경종은 죽어서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곁에 가지 못했으나 부인 선의왕후와 의릉에 사이좋게 잠들어 있다. 경종내외가 잠든 조선 왕릉에서 가장 오붓하고 아름다운 의릉을 산책해 보자.

‘의릉 전경’. 조선 제20대 왕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이 위아래로 조성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다. 효종의 영릉과 같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27.
‘의릉 전경’. 조선 제20대 왕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이 위아래로 조성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다. 효종의 영릉과 같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27.

◆후궁의 아들, 원자-세자-왕에 이른 험난한 길

1674년 숙종(조선 제 19대 왕)이 즉위하니 13세였다. 그러나 27세에 이르도록 자식이 없으니 왕실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1688년 8월 후궁 장씨가 숙종의 첫아들을 낳으니 바로 이균(훗날 경종)이었다. 이듬해 1월 숙종은 “왕자의 명호를 원자로 정하라”며 “대왕대비(인조의 장렬왕후)의 국상이니 하례는 하지 말라”고 했다.

1690년 4월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세자책봉을 청하니 숙종은 “책봉하는 예를 거행하라”고 했고 봄여름이 좋다고 아뢰니 “6월 초에 거행해야 하겠다”고 했다. 마침내 6월 16일 원자를 왕세자로 봉하였으니 나이가 3살이었다. 숙종은 이르기를 “내가 나이 서른에 비로소 어린아이를 보는 즐거움을 알았고, 조상의 대를 이어 이제 다행히도 부탁할 사람이 있다. 겨우 일어선 나이에 모두들 청하니 너를 왕세자로 책봉하노라”했고 교명문(세자에 내리는 글)에 이르기를 “3백년의 업이 내 몸에 와서 끊길까 염려하였다. 하늘이 복을 내려 전성(세자를 말함)의 경사가 있게 되었는가? 아아, 너 원자는 생김새가 매우 잘나고 성질이 범상하지 않아서, 천인(비범한 사람)의 표상이 있고, 슬하에 옷을 끄니 화기하고 온화한 부자의 정이 있다”고 했다. 세자책봉은 정국에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기사환국을 일으키며 서인 노론의 권력은 남인에게 돌아갔다.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어 쫓겨났고 이듬해 1690(숙종 16)년 10월 22일 숙종은 세자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장렬 왕후의 제사로 치르지 않았다가 비로소 거행했다. 그 옥책문에 이르기를 “왕은 이르노라. 부부의 윤리가 이루어지고, 안팎의 교화가 갖추어지므로, 임금의 다스림은 반드시 왕비의 어짊을 힘입어야 한다. 후궁에서 세자를 기르매 귀하게 된 어머니의 표상을 전하였고, 다행히 궁 안에서 덕이 있는 사람을 가리매 자나 깨나 구하던 짝에 합당하니, 아름다운 위호를 바루고 절차를 갖춘 의례를 거행한다. 아! 너 장씨는 일찍부터 아름다운 자태를 타고나고 훌륭한 가르침을 베풀었다”고 했다.

왕비 장씨와 아들 세자는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그러나 4년 후 1694년 3월 유생 김인이 왕비의 오빠 장희재와 민암이 반역에 연루되고 장희재가 숙빈 최씨를 독살하려했다고 고발했다. 숙종은 그냥 넘어갈 듯 하더니 하루 새에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에게 세력을 넘겼다. 4월 12일 폐비 민씨가 다시 왕비의 자리에 오르며 왕비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폐해졌다. 1701년 인현왕후가 세상을 뜨니 다시 희빈의 등장이 예상될 것 같았으나 인현왕후를 저주한 협의로 오히려 사사되고 말았다. 오빠 장희재도 유배 후 처형됐다. 경종의 나이는 13살이었다. 이후 왕실에는 인원왕후가 들어왔고 숙빈 최씨와 7살의 아들 연잉군이 자라고 있었다.     

경종과 선의왕후의 봉분이다. 위 좌측 봉분이 경종의 능이고, 아래 우측 봉분이 선의왕후의 능이다. 장명등이 없고 터만 남아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27.
경종과 선의왕후의 봉분이다. 좌측 봉분이 경종의 능이고, 우측 봉분이 선의왕후의 능이다. 장명등이 없고 터만 남아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27.

◆왕이지만 왕이 아니다

어머니가 왕실에서 내쳐지고 외삼촌이나 일가친척이 함께 처형·유배당하니 경종은 누구 하나 기댈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 숙종도 어머니 희빈장씨와 사이가 멀어지자 경종을 멀리하려 했고 심지어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왕세자의 자리도 연잉군으로 교체하려 했다. 경종은 이러한 환경에서 견뎌야 하는 데다 죽은 어머니에 대한 사무침과 통한 때문에 매우 힘들어했고 몸과 마음도 병약해졌다. 하지만 경종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처세해 숙종과 노론에게 약점이나 빌미를 잡히지 않았다. 1718년 첫 부인 세자비 심씨(단의왕후)가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해 경종보다 17세가 어린 13세의 선의왕후 어씨가 왕세자비에 책봉됐다. 세자는 아버지 숙종이 사망할 때까지 잘 버텨냈다. 그리고 1720년에 마침내 조선의 20대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1년 만에 노론의 압박으로 경종의 이복동생(후궁 숙빈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아야 했다. 1721년 8월 21일 연잉군이 왕세제 책봉을 거두어 달라고 상소했고 이에 경종은 “미리 세제를 정한 것은 종사를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30세가 지났는데 후사가 없고 몸이 안 좋으니 국사를 생각해 보면 어찌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대비와 군신들의 뜻을 받아 맡기니 백성들의 큰 희망에 부응하라”고 했다.

정자각 양옆으로 별도의 기둥을 세운 익랑이 있다. 익릉, 휘릉, 숭릉도 익랑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27.
정자각 양옆으로 별도의 기둥을 세운 익랑이 있다. 익릉, 휘릉, 숭릉도 익랑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27.

김창집은 연잉군을 대궐 안에 들어오도록 요구했다. 심지어 10월에는 조성복이 경종의 왕 역할을 연잉군이 하도록 대리청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니 경종은 “대소의 국사를 모두 세제로 하여금 재단하게 하라”고 했다. 최석항 등이 반대하며 “이제 30세에 재위 1년이고 건강도 담열로 물을 많이 마셔서 소변을 자주 보는 정도이니 명을 거두시라”고 했다. 왕세제의 상소도 계속됐다.

결국 노론도 왕명을 거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니 대리청정은 취소되었지만 외로운 왕 경종의 처지가 이와 같았다. 이에 1721년 신축년에 김일경 등이 주도해 경종의 세자책봉과 왕위계승을 반대한 이른바 노론 4대신(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이이명)을 탄핵했다. 이듬해 임인년 1월에는 연잉군이 환관 박상검이 자신을 제거하려 했다며 경종에게 왕세제의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했다. 결국 이일로 박상검이 처형됐다. 노론세력은 결집했다.

의릉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과 더불어 가을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왕릉에 꼽힌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27.
의릉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과 더불어 가을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왕릉에 꼽힌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27.

두 달 후 목호룡이 “왕을 해하려는 세력이 있다”며 옥사를 일으키니 노론 4대신이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1721년 신축옥사에 이어 1722년 임인옥사로 노론을 처벌·제거하는 등 정국을 주도하려 했으나 이 와중에 그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다. 1724년 8월 24일 경종의 병이 악화돼 의식을 잃었다. 이공윤이 “삼다(蔘茶)를 써서는 안 된다. 계지마황탕 2첩이면 설사는 금방 그치게 할 수 있다”고 했으나 증세가 위급하고 이광좌가 문후를 했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세제가 울면서 “인삼과 부자(중풍·통풍약제)를 급히 쓰도록 하라”고 했고 이공윤은 “내가 처방한 약에 다시 삼다를 올리면 기(氣)를 돌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다음날 오전 3시경 경종이 승하했다. 실록에서 사관이 이르기를 “임금은 인자하고 덕스러우며 일찍 학문이 이루어지고 물욕이 없었다. 지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근심과 두려움이 쌓여 병을 갖고 깊어지니 즉위 이래로 정사를 게을리하였고 조회에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정사를 신하에게 맡겼다. 그런데도 승하하여 신하와 백성이 슬피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백성이 왕을 공경하였다 이를 만하다”고 했다.

혜릉은 경종의 첫 왕후였던 단의왕후의 능이다. 왕세자빈으로 죽으니 1718(숙종 44)년 현재의 묘가 조성됐다. 경종이 즉위해 단의왕후로 추존됐고 1722(경종 2)년 왕릉 형식으로 조성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27.
혜릉은 경종의 첫 왕후였던 단의왕후의 능이다. 왕세자빈으로 죽으니 1718(숙종 44)년 현재의 묘가 조성됐다. 경종이 즉위해 단의왕후로 추존됐고 1722(경종 2)년 왕릉 형식으로 조성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2.27.

◆의릉, 두 젊은 왕부부의 보금자리

첫 부인 세자빈 심씨가 32세에 세상을 뜨니 1718(숙종 44)년 경기 구리시 동구릉에 묘를 조성했다. 조강지처로서 세자시절의 우여곡절을 함께 했지만 왕비가 되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심씨는 1720년 경종이 왕위에 오르니 단의왕후로 추존돼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했다. 1722(경종 2)년에 왕릉의 형식에 맞게 석물을 추가해 조성했다. 장명등은 없어져 터만 남고, 정자각은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가 1995년에 복원했다.

경종이 승하하니 1724(경종 4)년 양주 천장산 언덕인 현재 자리에 조성됐다. 선의왕후 어씨는 결혼 6년 만에 홀로 됐고 20세의 어린 나이에 왕대비가 됐으나 6년 후 26세로 자식도 없이 세상을 떴다. 1730(영조 6)년 경종의 아래 자리에 묻혔다.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의 자손에서 덕풍군을 양자로 두려 했으나 연잉군에 밀려 이루지 못했다.

의릉은 성북구 석관동에 소재하며 근처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종합예술학교가 있으며 옛 중앙정보부 자리가 능 안에 있다. 그간 왕릉출입이 통제되다가 1996년 정보부가 서초동으로 옮겨가면서 일반에 공개됐고 2005년에야 2년간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가을의 의릉은 조선왕릉 중에서 가장 고적하고 아름다운 공원의 자태를 보여주고 있어 많은 방문객과 주민들이 즐겨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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