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긴 잠에서 만물이 깨어나는 경칩

한 무제 이름 피해 ‘계칩’에서 ‘경칩’으로

조선시대 로맨스, 연인끼리 은행 나눠먹어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인 경칩은 만물이 약동하는 시기로 움츠려 지냈던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력이 소생하는 절기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4.03.04.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인 경칩은 만물이 약동하는 시기로 움츠려 지냈던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력이 소생하는 절기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4.03.04.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가 지나 ‘개구리도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 왔다.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인 경칩은 만물이 약동하는 시기로 움츠려 지냈던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력이 소생하는 절기다. 올해 경칩은 3월 5일이다.

‘한서(漢書)’에는 열 계(啓)자와 겨울잠을 자는 벌레 칩(蟄)자를 써서 계칩(啓蟄)이라고 기록돼 있었으나, 후에 한(漢) 무제(武帝)의 이름인 계(啓)를 피휘(避諱)해 놀랠 경(驚)자를 써서 경칩(驚蟄)이라 했다. 여기서 ‘피휘’란 ‘꺼리고 피하다’는 의미로 넓은 의미에서는 사람을 부를 때 본명을 부르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좁은 의미로는 왕이나 조상의 이름, 국호나 연호와 같은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만물이 깨어나는 시기

옛사람들은 경칩 무렵에 첫 번째 천둥이 치고, 그 소리를 들은 벌레들이 땅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동의보감’ 논일원십이회삼십운(論一元十二會三十運)에는 “동면하던 동물은 음력 정월에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절기로는 경칩에 해당하며, 음력 9월에는 동면을 시작하는데 절기로는 입동에 해당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이 농사의 본을 보이는 ‘적전(籍田)’을 경칩이 지난 해일(亥日)에 선농제(先農祭)와 함께 행하도록 정했으며, 경칩 이후에는 갓 나온 벌레 또는 갓 자라는 풀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을 놓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내리기도 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우수에는 삼밭을 갈고 경칩에는 농기구를 정비하며 춘분에는 올벼를 심는다고 했듯 우수와 경칩은 새싹이 돋는 것을 기념하고 본격적인 농사를 준비하는 중요한 절기이다.

경칩에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고 믿어 벽을 바르기도 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4.03.04.
경칩에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고 믿어 벽을 바르기도 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4.03.04.

경칩에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고 믿어 벽을 바르거나 담을 쌓아 집을 단장하기도 했다. 특히 빈대가 없어진다고 해 일부러 흙벽을 바르기도 했으며 빈대가 심한 집에서는 재를 탄 물그릇을 방 네 귀퉁이에 놓아두기도 한다. 이는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지반이 약해지기 때문에 이를 보강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 농촌에서는 경칩이 되면 산이나 논의 물이 괸 곳을 찾아다니며 개구리 또는 도롱뇽 알을 건져 먹었는데, 이는 그 알이 허리 아픈 데 좋을 뿐 아니라 몸을 건강하게 한다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의학에서는 몸 안의 독소를 배출시켜주는 효능이 있어 약재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이즘에는 단풍나무과에 속하는 고로쇠나무를 베어 그 수액을 마시는데, 한해의 새로운 기운을 받는다는 의미로 첫 수액을 받아 마셨다고 한다.

고로쇠 물은 뼈 건강에 좋을 뿐 아니라 이뇨작용 및 면역력, 해독작용 등에 도움을 준다. 특히 위장병이나 속병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경칩에는 냉이와 달래, 쑥 등을 먹으면서 칼슘과 비타민, 섬유질을 보충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예로부터 경칩에는 ‘개구리 알 먹기’ ‘고로쇠 물 마시기’ ‘봄나물 먹기’ 등을 통해 겨우내 움츠려 있던 몸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조선시대에는 경칩이 되면 연인들이 가을철에 모아뒀던 은행열매를 서로 나눠먹으며 사랑을 약속했다고 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4.03.04.
조선시대에는 경칩이 되면 연인들이 가을철에 모아뒀던 은행열매를 서로 나눠먹으며 사랑을 약속했다고 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4.03.04.

◆ 경칩의 풍속

옛날에는 경칩 즈음에 보리의 싹을 보고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예측하기도 했다. 추운 겨울을 지낸 보리의 싹이 잘 자라고 있으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흉년이 든다고 여겼다.

‘보리싹점’ 외에 ‘개구리울음점’도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이 집필한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따르면 경칩에 개구리 울음소리를 서서 들으면 그 해는 일이 많아 바쁘고, 누워서 들으면 편안하게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고 믿었다. 또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맨 먼저 들었을 때 앞에서 들으면 일년 내내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뒤에서 들으면 일년 내내 배가 고프다고 점쳤다.

경기도 광주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드러누워서 들으면 일년 내내 몸이 아프고 앉아서 들으면 건강하고 좋다고 믿었으며, 전북 무주군 적상면 사천리 서창마을에서는 개구리가 우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그 울음소리에 맞춰 “한 섬, 두 섬, 세 섬…”하고 외우는데 이렇게 하면 그 해에 벼 수확이 좋다고 믿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경칩이 되면 연인들이 가을철에 모아뒀던 은행열매를 서로 나눠먹으며 사랑을 약속했다고 한다. 한국식 밸런타인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농서인 ‘사시찬요(四時纂要)’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은행 껍데기에 세모난 것이 수 은행이요, 두모난 것이 암 은행이다.”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은행나무는 암수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며, 암수가 함께여야지만 열매를 맺을 수 있어 은행을 사랑의 결실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 처녀총각들은 경칩에 날이 어두워지면 좋아하는 상대와 함께 은행을 나눠먹으며 각자 수나무와 암나무를 돌며 사랑을 확인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