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

영화 ‘건국전쟁’을 봤다.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예상을 깨고 100만 관객몰이 중이다.

‘건국전쟁’은 이 전 대통령에 대한 그간의 오해를 걷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이다. 영화는 이 전 대통령이 6년 의무 교육제를 도입해 국민 문맹 퇴치에 앞장섰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의 국가방향을 설정했다는 점을 큰 업적으로 꼽았다.

이 영화를 본 뒤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한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서 이 전 대통령이 스포츠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을까 궁금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기사 검색에서 ‘이승만 체육’이라는 검색어를 확인했다. 여러 기사에서 그가 정부 수립 이전에도 체육 행사들에 참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지도자였던 이 전 대통령은 1945년 10월 귀국하자마자 각종 체육 행사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22일자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10주년 기념식 전에 ‘이승만 박사가 김구 총리와 함께 기념품을 각각 수여했다’고 전했다.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초로 2시간 30분 벽을 깬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조선인 첫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다.

조선일보 1946년 10월 17일자는 조선올림픽 대회(현 전국체육대회) 개막기사에서 ‘내빈축사로 이승만(李承晚)박사로부터 조선사람도 운동기술의 연마를 통해 체육의 향상과 조직력을 양성해 돌아오는 국제올림픽대회에는 조선민족의 씩씩한 기상과 우수한 능력을 세계에 보여주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축사가 있고’라고 보도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에도 이승만 박사가 조선올림픽 대회 개막식에 참석했음을 알렸다. 앞서 이 박사는 1년전인 1945년 10월 27일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된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 입장식에 참석해 손기정과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국체육백년사(이학래 저)’에 기술돼 있다.

당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던 여운형이 이승만 박사의 정치 라이벌로 조선체육회장(현 대한체육회장)을 맡았던 터였다. 하지만 신문 기사에서 보듯 여운형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정부 수립 이전부터 각종 체육행사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 최초의 사립학교인 배재학당 출신인 이 박사는 같은 동문인 서재필 박사와 함께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체육의 역할과 가치를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1948년 6월 20일자는 해방 이후 첫 올림픽인 런던올림픽 참가 대표선수단 결단식 기사에서 ‘성동원두구장에서 국회의장 이승만박사를 위시해 안재홍올림픽후원회장, 김 서울시장, 구 경기도지사, 김훈(金勳) 민정장관 보좌관,『헬믹』대장 등 내외국 명사의 다수 참석한 가운데 엄숙 성대히 거행됐다’고 전했다.

당시 5.10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제헌국회는 런던올림픽 출전선수단을 격려하는 이승만 국회의장 명의의 격려문을 채택했고, 올림픽 출전을 위해 선수들이 떠나는 성동원두(옛 서울운동장)에서 선수단 결단식 및 시민 환송식을 열어 전국민적인 기대와 관심을 보여줬다.

대한올림픽위원회(KOC)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 성립 이전에 국가 단위의 올림픽위원회를 승인받아 런던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명예를 걸고 출전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8월 15일 출범했지만 런던올림픽(1948년 7월 29일~8월 14일)은 그 이전에 열렸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손기정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했던 런던올림픽은 한국체육사의 신기원을 이룬 동시에 올림픽 역사에서도 뜻깊은 대회였다. 선수단은 미군정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올림픽에 나섰다.

갈 때는 정부수립 전이었지만 올 때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는데, 역도 김성집과 복싱의 한수안이 대한민국 올림픽 첫 동메달을 획득했다. ‘건국전쟁’을 통해 재인식된 해방전후사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역할을 스포츠사적인 측면에서도 새롭게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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