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공광규(1960~ )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갓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 자꾸 폭설로 지워주신다

 

[시평]

올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다. 낮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한밤중에도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내려, 산이며, 들이며, 사람들이 나다니는 거리며, 상점이며, 동네며,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어슬녘에 시작한 술자리가, 그치지 않는 눈을 핑계 삼아 2차로, 또 3차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거나하게 취하여 눈길을 밟으며 돌아온다. 궁극적으로는 술을 거나하도록 마시게 하고, 또 거나해진 김에 노래방까지 들리게 한 것은, 모두 낮부터 펑펑 쏟아진 눈 탓이 분명하다. 눈과 함께 늦은 귀갓길에서 이리 미끄러지고, 저리 미끄러지며, 갈지자의 세상을 걸으며, 온통 새하얀 세상이 모두 내 것이라도 된 듯이 기고만장이다. 

한참을 비틀거리며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내 발자국은 하나도 없고, 그동안 쌓인 눈만이 소복하다. 하느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모양이다. 삐뚤빼뚤 온통 난장을 치고만 내 발자국을, 아니 내 흐트러진 마음을 따라오시며, 괜찮다, 괜찮다, 하시며 자꾸 자꾸만 폭설로 덮어주신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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