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40대 이후부터 고고학에 관심을 가진 독일의 부유한 상인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은 어린 시절 깊은 인상을 남긴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를 찾겠다고 여행을 떠났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히사리크 언덕이 그가 찾던 전설의 도시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가 탐사를 시작하기 전 이미 17세기부터 차나칼레에 살던 칼버트 가문의 영국 영사 프랑트 칼버트(1828~1908)가 히사리크 언덕에서 소규모 발굴을 통해 이곳이 트로이였음을 증명했다. 칼버트의 도움으로 트로이를 발굴하기 시작한 슐리만은 1870년, 일리아드의 전설에서 묘사한 히사리크의 첫 번째 발굴을 지휘했다. 1871~1873년, 1878년, 1879년, 1882년, 1890년에 대규모 발굴작업이 이어졌다. 1890년에 슐리만이 급사한 후, 그의 동료였던 건축가 빌헬름 도르프펠트(1853~1940)가 슐리만의 부인 소피아 슐리만의 재정 지원을 받아 발굴작업을 계속했다.

슐리만은 호머의 트로이를 발견하려는 지나친 욕망 때문에 유적지의 모든 문화재층을 손상시켰다. 더구나 1873년에 발견한 프리아모스의 보물을 포함한 유물을 해외로 밀반출했기 때문에 보물 사냥꾼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발굴작업 후반부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칼버트와 도르프펠트가 확립한 고고학적 계층화론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트로이 발굴은 선사시대 고고학의 출발점으로 여긴다. 히사리크의 발굴 계획은 도르프펠트의 관찰을 기초로 1에서 9까지의 번호가 매겨졌다.

19세기에 칼버트, 슐리만, 도르프펠트가 발굴한 유물들은 이스탄불, 아테네, 베를린의 박물관으로 흩어졌다. 1만여점의 유물이 37개의 대학교와 박물관에 기증돼 교육에 활용됐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프리아모스 보물을 포함한 트로이 유물이 베를린에서 사라졌다. 약 50년 후, 러시아 군인들이 독일에서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견된 트로이 유물은 독일에 있던 것들이다. 트로이 유물은 1998년에 지금의 모스크바 푸시킨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도르프펠트 이후, 20세기에 발굴된 트로이 유물은 1932~1938년 사이에 칼 브레겐(1887~1971)에 의해 미국 신시내티 대학으로 옮겨졌다. 당시 가장 발단된 굴착기술이 이 발굴 과정에 활용됐다. 언덕은 36개의 작업 영역으로 나누었다. 브레겐이 1950년대에 발표한 발굴결과에 대한 기록은 아나톨리아와 에게해의 고고학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에게 소중한 가이드가 됐다. 그가 발견한 유물은 지금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50년 후, 투빙겐대학의 오스만 코르프만(1942~2005)이 트로이에서 새로운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은 그가 2005년에 갑자기 사망할 때까지 발굴, 복구, 결과발표가 동시에 진행됐다. 트로이성 내부의 발굴을 통해 이전 발굴에서 발생한 성층(成層)에 대한 문제가 해결됐다. 성 밖에서 진행된 지표조사와 굴착 결과 트로이는 트로이1에서 트로이7까지 하층 도시가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그에 따라 트로이는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10배 이상 큰 정착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구나 트로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문서로 루비안어로 새긴 인장은 트로이와 히타이트제국 사이의 관계를 증명했다. 히타이트 문서에서 말한 Wilusa가 Ilium 또는 Ilios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트로이 평야에서 이뤄진 지형학적 연구결과와 결합된 도시의 방어시스템인 해자와 성벽은 학자들에게 고대 유적지와 자연환경이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시와 유사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지리적 이점 때문에 트로이는 3천년 동안 계속된 정착지였다. 햇빛에 말린 벽돌은 주택건설과 방어벽 공사에 사용됐다. 이러한 건축자재는 동방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됐지만, 유럽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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