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오스만 코프만(M Osman Korfmann) 교수가 1988년에 시작한 새로운 발굴작업은 트로이 연구에서 전환점이 됐다. 발굴작업과 동시에 트로이와 관련된 국제전시회와 출판이 진행돼 국제적 관심이 높아졌다. 2005년, 코프만이 사망한 후에도 그가 이끌던 국제고고학팀이 발굴 작업을 계속 진행했다. 2013년부터 튀르기예 문화관광부를 대신한 차나칼레 온세키즈 마트 대학교의 러스템 아슬란(Rustem Aslan) 교수가 트로이 발굴을 주도했다. 2006년 이후 진행된 저지대 발굴을 통해 트로이성 남문과 트로이 전쟁 시대의 해자가 잇달아 발견됐다. 호머의 일리아드에서는 이러한 시설이 전차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발굴작업 이외에도 유적의 보존과 방문객을 위한 배려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뤄졌다. 발굴팀은 트로이 고고학 유적지에 대한 상세한 관리계획을 수립했다. 트로이와 그 주변 지역은 1996년에 트로이 역사국립공원으로 지정됐으며, 고고학 유적지 자체는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최근 가장 중요한 성과는 약 15년 동안 진행해온 트로이 박물관이다. 문화관광부가 구성한 자문위원회는 트로이 박물관 디자인 공모전을 개최했다. 결과가 발표된 후 문화관광부, 환경산림부, 차나칼레 지방정부, 건축협회 등 관련 기관이 의정서에 서명했다. 트로이 고유의 박물관 건립을 위한 중요한 결정이었다. 2018년, 트로이의 해를 기념하는 중요한 행사가 진행된 것에 맞춰 차나칼레 트로이 박물관이 6월에 우선 개관됐다. 박물관은 신화, 고고학, 지리학, 역사학적 관점에 따라 현실과 상상이 혼합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4층짜리 박물관 1층은 발굴과 발견에 관련된 아이디어를 보여주기 위해 지하에 설치했다.

트로이라는 이름은 아나톨리아에 있었던 고대 도시 이상의 의미가 있다. 트로이는 아나톨리아를 넘어 유럽은 물론 세계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스미르냐의 호머가 이 도시 이야기를 들려준 일리아드는 BC700년 무렵 처음 등장한 이래 많은 예술가, 정치가,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불후의 세계적 문학작품이다. BC100년 무렵에서 AD500년까지 고대 지중해를 선권하고 서아시아까지 지배한 로마를 유럽문화의 선봉으로 여겼던 많은 중세의 통치자들은 자신의 혈통이 트로이인과 연결됐다고 생각했다. 트로이는 유럽문화사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트로이에 대한 투르크인의 관심도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자신을 트로이인으로 여겼던 정복자 술탄 메흐메트가 1462년에 이곳을 방문했다. 트로이는 동서양이 지리적, 문화적, 정치적, 역사적으로 만나는 보기 드문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트로이에는 동양과 서양이 하나로 융합된 과거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19세기부터 진행된 트로이 유적 발굴사업 덕분에 트로이는 근대 고고학의 기초를 세운 곳이기도 하다. 튀르기예 문화관광부가 제출한 청원서에 따라 유네스코가 트로이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것은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트로이는 카라멘데레스(스카만데르)강의 삼각주와 가까운 차나칼레(다르다넬즈) 해협의 에게해 연안에 있다. 이곳은 아나톨리아의 선사시대 정착지 가운데 가장 큰 지역이다. 트로이 언덕은 카라멘데레스강이 운반한 충적층 평야에서 20~50m 높이이다. 전략적 위치에 자리 잡은 이 삼각형 언덕은 완벽한 방어시스템을 갖춘 정착지였다. 이는 BC 3000년 무렵의 전형적인 정착지 유형과 유사하다. 그 시대에 바다는 언덕의 북쪽까지 이르렀다. 청동기 시대로 알려진 2000년 동안 정착지는 15m 가까이 높아졌다. 지금 바다는 트로이 언덕에서 보일락말락 할 정도의 먼 곳으로 밀려났다. 바다와 트로이 언덕 사이는 비옥한 평야 지대로 변했다. 유럽과 아시아라는 두 개의 대륙과 에게해와 흑해라는 두 개의 바다 사이라는 전략적 위치 때문에 사람들은 수천년 동안 이곳에 터전을 마련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수많은 전쟁과 파괴가 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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