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정착지의 역동성은 트로이의 지정학적 위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트로이에서 발견된 수많은 고분은 활발한 상업 활동과 함께 여기에서 생산됐을 가능성이 높은 금속제품이 도시 경제의 원동력이자 엄청난 부의 원천이었음을 증명한다.

트로이6에서 트로이7까지 BC 1300년~BC 950년은 청동기 말기에서 철기 초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트로이는 일리아드에서 언급한 아카이아인의 왕국 아히야와(Ahhiyawa)와 히타이트 사이의 패권 다툼 때문에 더욱 중요해졌다. 아나톨리아와 에게해 전체에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트로이 전역에 새로운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방어벽이 세워지고, 창고도 지었다. 히타이트와는 우호조약이 체결됐다. BC 1200년대에는 이 지역에서 중요한 사건이 계속 발생해 긴장이 고조된 것이 특징이다.

Dorpfeld는 계층화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Blegen은 화재로 소실된 유적이 일리아드의 트로이 또는 일리움과 같다고 생각했다. 1988년 이후의 발굴을 통해 BC 1300~BC 1180년이 호머의 트로이 또는 (W)Ilios/Taru(w)isa/Wilusa의 시대와 동일하다는 것이 대부분 입증됐다. 앞에서 언급한 정치적 긴장은 도시 건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전에 열려있던 문은 이 시기에 이르자 닫혔다. 정착지는 점차 더 붐볐고, 요새의 내부는 물론 외부도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 시기의 트로이 윌루사라는 도시는 BC 1180년에 파괴됐고, 약 100년 후에는 지진으로 다시 파괴됐다. 그러나 이 시기의 파괴는 전쟁의 결과이기도 했다. 고고학적 관점에서 트로이 전쟁을 알려면 이 시기의 정착지가 그와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결과로 보이는 대파괴 이후, 다소 짧은 기간이지만 이전 형식의 건축과 도자기는 부분적으로 지속됐다. 당시 주민들은 이전 정착민과 유사한 문화를 공유한 인근 정착지에서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에는 놀랄 정도로 많은 도자기가 유적지에서 발견됐다. 녹로(轆轤)가 처음 사용된 지는 이미 수천 년이나 지난 셈이다.

이전 도시 위에 새로운 도시를 재건하는 사업은 스스로 트로인이라고 자부하는 저층민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로 결과가 마무리되지는 못했다. 지진, 화재, 전쟁의 연속으로 트로이 고급문화가 종결된 후, 고대 전통과 다른 새로운 요소들이 발전됐다. 이 시기를 트로이7로 규정한다. 물레를 사용해 생산한 도자기 외에도 새로운 유형의 도자기가 갑자기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발칸반도 동북부와 흑해 서부 지역에서 생산된 독특한 수제품으로 홈과 손잡이가 있는 도자기이다. 건축은 성의 내외에 소규모 건물이 집중됐다. 이 시기에 방어용 성벽은 어 이상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트로이7에서 성벽의 하부는 수직 또는 불규칙하게 놓인 돌로 덮였다. 이 단계가 끝나면서 정착지는 BC 950~BC 700년까지 약 250년의 공백기로 들어간다. 트로이는 폐허로 변했고, 방어벽과 궁전은 흔적만 남았다.

트로이8(BC 700~BC 85)은 그리스 일리온 시대로 아카이아에서 헬레니즘 시대에 해당한다. 이 기간에 트로이는 대부분 버려진 곳이었다. 요새 서쪽의 성지에서 발견된 희생물로 미루어 보면, 이곳은 호머의 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신성한 곳이었다. 트로이의 폐허는 특히 3세기부터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 ‘신성한 일리온’으로 알려졌다. 요새 내부의 아테나 여신과 함께 도시는 종교적 성지로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 시기에 도시 연맹의 일부였던 일리온은 이 지역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가 됐다. 언덕의 남쪽 하부 도시의 폐허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됐다. BC 3세기 말까지 이 정착지는 직각으로 교차하는 거리와 3.4㎞나 되는 방어벽을 갖춘 잘 계획된 도시로 변했다. 신성한 도시 일리온은 BC 85년, 로마제국의 내부분쟁으로 인해 로마군 사령관 핌브리아(Fimbria)에 의해 완전히 파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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