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2500만명 북한 주민치고 한국의 국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한민국은커녕 한국이란 말도 잘 모른다. 제대로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함부로 발설하면 정치범 취급 받을 수 있다. 남한 사람들은 어떤가? 북한의 국호를 대충 알지만 정확하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답변하는 사람은 드물다. 한국 대학의 북한학 강의에서 인민이나 민주주의 하나쯤 빼고 답변하는 학생들이 태반이다. 올해 들어와 북한의 평양에서 대한민국 호칭이 자주 들려오고 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올봄 두 차례나 대한민국이라고 호칭하더니 7월 27일 일명 전승기념일에는 강순남 국방상이 열병식장 연설에서 대한민국을 또렷하게 발음해 참가자들을 어리벙벙하게 만들었다.

지난 9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9차 회의에서 북한의 통치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3차례 이상 대한민국을 언급했다. 뭐 어쩌자는 건가? 그런데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 경기에 참가한 북한 선수단의 입에서는 또다른 한국 호칭이 튀어나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고 있다. 대한민국을 향해 ‘괴뢰’ 이 험악한 말을 북한 선수단과 방송단은 서슴없이 뇌까렸다. 정확하게 북한은 지난달 30일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북 여자축구 8강전 결과를 보도하면서 우리나라를 ‘괴뢰’로 지칭했다.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은 남북 여자축구 대결 이튿날인 지난 10월 1일 경기 결과를 전하면서 그동안 사용하던 ‘남조선’ 대신 ‘괴뢰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북한 주민이 시청하는 조선중앙TV는 지난 2일 “경기는 우리나라(북한) 팀이 괴뢰팀을 4:1이라는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타승한 가운데 끝났다”고 보도했다. 북한팀 득점 장면 위주로 편집한 영상 하단의 스코어 자막에서도 ‘조선 대 괴뢰’라는 어처구니없는 국가명을 고수했다.

북한 사전상 ‘괴뢰’는 “제국주의를 비롯한 외래 침략자들에게 예속돼 그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조국과 인민을 팔아먹는 민족 반역자 또는 그런 자들의 정치적 집단”이라는 뜻이다. 주로 북한이 한국을 비난하는 선전전에서 활용되던 표현이다.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 때도 사용된 ‘남조선’이라는 표기가 일반적이었다. 과거 냉전시대에도 스포츠 경기에서 대한민국을 괴뢰라고 언급한 사례는 많지 않았다.

북한이 이례적으로 스포츠경기에서까지 ‘괴뢰팀’ 표현을 쓴 것은 최근 남북관계가 악화한 실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북한 매체에서 ‘괴뢰’라는 표현의 빈도는 현 정부 들어 높아졌다. 그러나 국제대회에서는 ‘정확한’ 국가명을 불러야 한다며 우리의 ‘북측’이라는 표현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북한의 태도를 고려하면 모순적인 행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의 리유일 감독은 지난달 30일 한국전에서 승리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국 기자가 북한을 “북측”이라고 부르자 “북측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 전날 여자 농구 남북 대결에서 북한이 패배한 뒤 기자회견에서도 선수단 관계자가 기자의 ‘북한’ 언급에 “우리는 ‘DPRK(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다. ‘노스 코리아(North Korea)’라고 부르지 말라. 그것은 좋지 않다. 이름을 정확히 불러야 한다”고 반발했다. 승리한 여자 축구에서 ‘괴뢰팀’ 표현을 쓴 북한은 전날 한국에 패배해 은메달을 획득한 탁구 여자복식경기를 보도하면서는 자국 선수(차수영·박수경)만 언급하고 한국팀은 아예 거론하지 않았다.

북한의 통치자 김정은마저 대한민국 국호를 남발하는데 왜 정치적 중립이 보장돼야 하는 스포츠 경기에서 한국을 ‘괴뢰’로 부르고 있는가. 북한 선수단은 평양을 떠나면서 사상교육을 단단히 받은 모양인데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어서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먼저 김여정 부부장, 강순남 국방상,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 에스컬레이션 된 대한민국 호칭의 정치·경제학적 의미를 분석해 보자. 북한에게 대한민국은 40년 이상 앞선 공포의 대상이다. 흡수통일의 공포증은 벌써 30년 넘게 평양을 배회하는 저승사자의 유혹이다. 이제 김정은 체제는 국제법적으로 한반도를 둘로 쪼개 남남으로 살자고 한국의 국호를 호칭하고 나선 것이다. 경제적 및 군사적 열세를 국제법적으로 보호받음으로써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만이라도 지키겠다는 것이다. 군사적으로는 물론 경제·문화적으로 UN의 보호를 받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킬 수 있다면 김정은 체제에게는 최고의 안심이다. 그렇다고 화해 무드를 깨며 괴뢰라고 부른다고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무역국가로 북한과는 비교가 안 되는 선진국가이고 북한은 인민이 헐벗고 굶주리는 최빈국이다. 김정은이여, 3만 4000명 탈북민이 한목소리로 김정은 괴뢰라고 한 번 소리높여 불러줄까?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