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1950~1960년대를 살아온 필자는 요즘도 쌀이 조금 섞인 보리밥에 노란 황금빛 고구마가 들어간 어릴 적 ‘고구마밥’이 생각난다.

보릿고개 꽁보리밥조차 먹기 힘들었던 시절 다행히 어머님이 하숙집을 운영하셨던 탓에 밥사발에 그나마 하얀 쌀이 섞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토광에 고구마를 쌓아 놓으시고 매일 가마솥에 사발을 엎어 놓고 고구마를 넣고 물을 조금 부은 후에 할머니 방 아랫목이 따스해질 때까지 군불을 때신다.

이렇게 익은 고구마는 하숙생은 물론 우리 가족들의 겨울 밤참이었다.

고구마와 부엌 헛간에 묻어둔 항아리 속 동치미는 지금도 군침이 도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특히 우리 집 동치미는 단단한 무와 청각, 풋고추, 파를 넣고 대나무 잎으로 봉해 놓아서 그런지 시원하고 상쾌한 맛이 났다.

동치미를 십자로 길게 썰어 젓가락에 꽂고 삶은 고구마와 먹으면 겨울 긴 밤 출출했던 밤참으로는 제격이었다.

전쟁으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높은 세율로 식량난에 허덕일 때 일본에도 카테메시(糧飯)라는 밥이 있었다.

우리나 일본이나 농민들이 밥의 양(量)을 늘리려고 쌀에 곡 채소를 넣어 밥을 지었는데, 카테메시는 밤, 고구마, 채소를 같이 넣고 지은 밥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쩌면 고구마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그 시절에 부족한 식량을 대체하는 효자식품 중의 하나였다.

“名曰甘藷 或云孝子麻 倭音古貴爲麻(명왈감저 혹운효자마 왜음고귀위마) 이름은 ‘감저’라 하는데 ‘효자마(孝子麻)’라고도 하며 일본 발음은 ‘고귀위마(古貴爲麻)’이다(해사일기, 海槎日記).”

쓰시마(對馬島) 방언으로 고구마를 ‘고귀위마’라고 부르지만 어떤 효자가 고구마로 부모를 봉양(孝行)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해 고구마를 ‘고코이모(孝行芋, こうこいも, 효행우)’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코이모라는 명칭은 일본의 대마도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잘 쓰이지 않으며, 오늘날 일본에서는 고구마를 가리켜 과거 사쓰마 번의 이름을 따 ‘사쓰마이모(薩摩芋)’라고 부른다.

1824년 유희(柳僖, 1773∼1837)의 ‘물명고(物名考)’에 고구마는 ‘고금아’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한자를 어떻게 음차하는지는 사람마다 다양했으나 어쨌거나 고구마라는 단어는 쓰시마 섬에서 고코이모라고 부르던 것이 점차 변형돼 ‘고구마’가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엄(趙曮, 1719~1777)이 고구마를 쓰시마에서 1763년 조선으로 가져와 재배에 성공한 곳은 웅천현(熊川縣)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이다. 그 후 고구마의 재배면적은 급속도로 넓혀졌던 것 같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흑산도로 귀양을 가 원래 채소밭 가꾸기를 좋아하던 그가 이웃의 규모가 작은 채소밭을 가꾸는 사람이 있어 가끔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和蘇長公東坡(화소장공동파) 소장공 동파 시에 화답하다’라는 여덟 수의 시(詩)에서 “土産貴藷芋(토산귀저우) 토산으로는 귀한 고구마가 있어, 求者此湊會(구자차주회) 그를 구하러 이리로 몰려든 다네”라고 했다. 고구마를 구하러 흑산도까지 온다는 이야기다.

이학규(李學逵, 1770~1835)의 ‘낙하생집(洛下生集)’에는 ‘藷芋今秋滿意栽(저우금추만의재) 고구마를 올가을에 심는다’고 나온다.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당시 중국의 단저우시 풍습 중 익은 고구마로 점을 치는 풍습이 있다고 적었으며, 발해 안변부에 속한 경주지(瓊州志)에 경주와 백석 두 마을의 고구마가 특별히 맛이 있다고 적었다. 조선 후기 고구마는 일본뿐 아니라 중국이나 조선에도 재배했던 것이다.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정조지에는 저반(藷飯, 고구마밥)과 저반방(藷飯方, 고구마밥 짓기)이 나온다.

고구마밥은 고구마의 섬유질이 혈당 상승을 막아주기에 당뇨환자들에게도 좋다.

고구마는 감자와 달리 생으로 먹기도 하고, 찌거나 구워 먹기도 한다.

고구마는 섬유질이 많아 변비에도 좋고 야라핀이라는 성분이 소화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퍽퍽한 질감에 비해 의외로 소화도 잘된다. 다만 껍질째 먹으면 섬유질이 너무 많아져서 방귀가 더 많이 나오게 된다.

고구마 잎에도 좋은 성분이 많은데, 일부 지방에서는 콩잎처럼 고구마 잎도 절임이나 김치를 담아 먹기도 한다. 상당히 별미다. 고구마 순도 살짝 데쳐 된장과 버무려 나물을 만들어 먹거나 다듬어 고구마 순 김치로 담그기도 하며, 장국을 끓여 먹을 수 있다. 고구마 줄기를 무쳐서 나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콩고에서는 마템벨레(matembele)라고 하는 요리로, 삶은 고구마 잎에 양파, 마늘, 각종 향신료와 육수를 넣고 푹 끓여서 카레라이스처럼 밥과 함께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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