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상추의 계절이 돌아왔다. 텃밭에 서너 포기만 심어도 식구가 단출한 가정은 한여름 쌈이나 겉절이를 해 먹을 수 있다. 선비의 고장 옛 진주에서는 쌈을 싸 먹는 것을 보고 양반인지 상놈인지를 구별했다고 한다. 상추쌈을 쌀 때 보통은 상추의 부드러운 앞부분이 위로 가고 줄기가 손바닥으로 가게 쌈을 싸는데, 진주 양반들은 입 안에 닿는 촉감이 부드럽게 상추의 부드러운 부분을 손바닥으로 가게 쌈을 쌌다고 한다.

근본과 예를 중요시하던 조선에서는 맛있는 상추쌈은 먹기를 참 조심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사소절(士小節)’에서 상추를 싸 먹을 때 직접 손을 대서 싸면 안 되며, 먼저 수저로 밥을 떠 밥그릇 위에 가로놓고 젓가락으로 상추 2~3잎을 들어 밥을 싼 다음 입에 넣고 그다음에 된장을 떠먹는다고 했다. 특히 여자가 상추쌈을 싸 먹을 때 너무 크게 싸서 입을 크게 벌리는 것은 상스러우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상추의 학명은 ‘Lactuca Sativa’인데 락투카에서 출발해 락투카리움, 락투세린, 락투신 등의 잠이 오게 하는 성분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영어로는 ‘lettuce’라고 한다. 재배 역사가 매우 오래돼 기원전 4500년경의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 작물로 기록됐으며, 기원전 550년에 페르시아 왕의 식탁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스나 로마시대에 중요한 채소로 재배됐고, 중국에는 당나라 때인 713년의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상추를 우리말로는 ‘부루’라고 하는데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부루를 세속에서 ‘와거(萵苣)’라 부른다고 했으며, 혹은 청채(靑菜), 생채(生菜)라 부른다고 했다. 날것으로 먹기 때문에 생채라고 한 것이 음운 변화를 거쳐 ‘상추’ 또는 ‘상치’가 됐다고 한다.

‘해동역사(海東繹史)’ 물산지(物産志)에는 ‘천록지여(天祿識餘)’를 인용해 고려국의 사신이 오면 수나라 사람들이 채소의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몹시 후하게 줬으므로,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했는데 지금의 상치라고 했다.

해동역사에는 원나라 시인 양윤부(楊允孚)의 ‘난경잡영(灤京雜詠)’을 인용한 “海紅不侶花紅好(홍불려화홍호) 해홍은 붉은 꽃만 같지 못한데, 杏子何如巴欖良(행자하여파람량) 살구가 어찌 파람(巴欖)처럼 좋겠는가. 更說高麗生菜好(갱설고려생채호) 다시금 고려의 생채를 말할진댄 摠輸山後蘪菰香(총수산후산미고향) 뒤편의 향초(香草)를 모두 가져온 것 같네”라는 구절이 있다. 육식을 즐기던 원나라 사람들은 밥을 상추에 싸 먹는 고려 풍습이 꽤 낯설고, 또 싱그러운 생채의 맛에 놀랐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연산군 11년(1505) 3월 25일 기록에 의하면 ‘경기감사에게 상추, 순나물 등의 채소를 봉진하게 하고, 모든 채소는 각도로 하여금 뿌리째 흙을 얹어서 마르지 않도록 하여 봉진하게 하였다. 서울에 당도하면 말라서 바칠 수 없어 저자에서 사게 되니 그 값이 뛰어올라서 재력을 다하여도 갚아 낼 수 없었다’는 것으로 보아, 상추는 경기도 인근에서 진상됐음을 알 수 있다.

구한말 강화도의 양명학자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 1858∼1924) ‘해경당수초(海耕堂收草)’에 ‘萵苣飯 示春弟(와거반 시춘제) 와거반 춘제에게 보이다’라는 시에는 “萵苣葉如掌(와거엽여장) 상추의 잎은 손바닥 같고, 辣醬濃似飴(랄장농사이) 된 고추장은 엿과 비슷하네. 包此脫粟飯(포차탈속반) 여기에 현미밥 쌈을 싸, 大嚼沫流頤(대작밀류이) 크게 씹으면 거품이 턱으로 흐르네. 稍稍蠶食葉(초초잠식엽) 조금씩 누에가 잎을 갉아 먹는 듯, 索索馬齕萁(소소마흘기) 스륵스륵 말이 콩깍지를 씹는 듯. 目瞬喉欲裂(목순후욕열) 눈은 감기고 목구멍은 찢어질 듯, 耽耽興痿脾(탐탐흥위비) 맛에 탐닉하여 비장이 저려오네. 頓呑十數顆(둔탄십수과) 급하게 열 몇 쌈을 삼키니, 已見空椀瓷(이견공완자) 이미 그릇이 다 비었네”라고 했다.

상추에 현미밥을 얹고 달착지근한 고추장을 양념을 넣어 쌈을 싸서 밥 한 그릇을 다 비운 눈에 선한 맛있는 정경이다.

1800년대 말의 고조리서(古調理書)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상추쌈은 상추를 깨끗이 씻어 다른 물에 담고 기름을 쳐서 저으면 상추에 기름이 흠뻑 밴다. 잎을 펴서 개어 담고 고추장에 쇠고기를 다져 넣고 웅어나 까나리나 다른 생선을 넣어 파를 갸름하게 썰고, 기름을 쳐서 쪄내어 물에 끓여 쌈으로 먹는다. 쌈에는 세파와 쑥갓과 향갓을 곁들여 담는다고 했다.

서울 지방에서 여름철에 해 먹는 떡 중에 와거병(萵苣餠)이 있다. 상추잎을 뜯어 멥쌀가루에 훌훌 섞어 거피팥고물을 얹어 찌는 떡으로 노란색 고물과 사이에 보이는 푸른색 상추가 보기에 좋고 상추의 쌉싸름한 맛과 씹히는 맛이 독특한 떡이다.

한말 위관(韋觀) 이용기(李用基, 1870~1933)가 1943년에 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 “상추떡은 사월 초파일에 쌀가루에 연한 느티나무잎을 섞어서 해 먹는 느티떡과 함께 별미로 손꼽히는 떡”이라고 기록돼 있다. 담백한 맛과 상추 특유의 쌉싸름한 맛, 씹히는 맛이 팥고물과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보기 좋게 잘라 담으면 노란 고물과 상추의 푸른색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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