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우리 역사에서 생전과 사후에 ‘성왕(聖王)’이라고 불리는 분은 백제 성왕뿐이다. 성왕은 왜 생전에도 백성들로 하여금 성왕이라고 불렸을까. 성왕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줄인 말로 불교 흥업의 제왕에게 붙여주는 최고의 호칭이다.

전륜성왕은 기원전 3세기 인도 마우리야 왕조시대 아쇼카왕(Asoka)을 지칭한다. 비폭력으로 국토를 통일하고 가장 강력한 불교정토를 이룩한 영웅이다.

고대 중국이나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도 전륜성왕이 되고자 했던 왕이 많다. 신라진흥왕도 두 아들의 이름까지 전륜성왕의 아들 이름을 따랐다. 황룡사에 가장 큰 금동미륵상(장륙상)을 만들어 봉안한 것도 스스로 전륜성왕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은 사후에 성왕이라는 칭호를 받지 못했다.

백제 성왕은 당시 가장 문명이 발달했던 남제 양나라와 돈독한 유대를 맺었다. 성왕의 염원은 백제 부흥이었다. 왕은 웅진(지금의 공주)시기에도 양나라 무제에 대한 보은으로 ‘대통사’를 창건했다.

성왕은 더 크고 아름다운 왕도를 경영하는 것이 소망이었다. 협소한 공주는 적을 방어하기에는 유리하지만 일국의 왕도로 웅장한 모습을 갖추기에는 부족했다.

성왕은 사신들과 승려들이 전하는 양나라 황도의 모습을 듣고 부여로의 천도를 결심한다. 그리고 무제에게 불교서적과 토목기술자, 기와를 굽는 와장, 화사까지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무제는 스스로 ‘보살황제’라고 칭했으며 이 때문에 양나라에 관음보살신앙이 크게 발전했다. 그는 동태사에 들어가 평상모인 삼신형관을 쓰고 불도를 닦았다. 무제는 성왕의 요청을 묵살하지 않았다. 백제에도 자신이 생각하는 불국정토를 구현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백제는 양나라 기술 집단의 대거 유입으로 삼국 중 가장 발전된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다. 양나라 기와기술은 백제에 와서 더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태어났다. 백제 장인들은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와를 만들어낸 것이다.

성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이 되고자 했던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백성들에게 전쟁의 비극을 종식시키고 식량이 풍부하며 모두가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국 간의 알력은 성왕의 염원을 앗아간다. 동성왕 대부터 맺은 신라와의 동맹은 진흥왕의 북벌정책으로 균열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신라군이 소백산을 넘어 한강을 공략한 후 백제의 옛 땅을 장악하자 성왕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금강 상류에 진주한 신라군은 백제 접경인 보은에서 탄부를 넘어 지금의 옥천 고리산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태자 창(나중에 위덕왕)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이끌고 고리산에 진주해 신라와의 전쟁에 나선다. 성왕은 끝까지 신라와의 동맹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사랑하는 공주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는 결단을 보였다. 그러나 이 해에 불행하게도 성왕은 고리산 근처에서 신라 복병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한 것이다.

백제의 국운은 이 시기부터 기울어진 것인가. 불국정토 부여의 찬란함도 빛을 잃은 것은 아니었을까. 부친을 잃은 위덕왕은 슬픔을 억누르고 부왕의 위업을 기리는 사업을 많이 벌이기도 했다.

지난 16일 프레스 센터 국제학술세미나에서 공개된 백제 금동보살입상은 양나라 보살신앙의 영향을 받은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백제 금동보살상에서는 처음 보는 보관을 하고 있다. 양나라 무제가 동태사에 들어가 평소 쓴 삼산관 형태다. 성스럽기까지 한 보살입상의 얼굴은 그동안 발견된 백제 불상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성스럽다.

평화를 사랑하고 백성들의 삶을 먼저 생각한 성왕의 얼굴처럼 빛나고 있다. ‘왕즉불(王卽佛, 왕은 곧 불상이다)’이라고 한 표현으로 미루어 이 금동보살상이 혹 성왕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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