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식 6.25유공자회 지부장
인민재판 등 강압 피해 입대
휴전 직전 금성전투서 총상
참전명예수당 고작 39만원
“전우들, 하루라도 편히 살길”

전쟁은 분리를 낳는다. 부모와 자식 간, 연인 간, 안식처에서 피난처로, 삶에서 죽음으로 영원한 이별을 맞게 한다. 한국에서도 70여년 전 동족 간에 전쟁이 벌어져 많은 이들이 고통 받았다. 3여년에 걸쳐 있어진 비극에는 국군 62만여명 과 유엔군 15만여명 등 77만여명이 전사, 부상, 실종됐고 이재민은 1000만여명에 달했다. 가족을 잃거나 헤어진 사람들은 아직도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고 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는 종전이 아니라 현재 정전 중이다. 본지는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전쟁 발발부터 종전까지 주요 과정을 짚어보고 참전 영웅들이 전하는 전쟁의 실상을 통해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 지부장이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06.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 지부장이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3.07.06.

[천지일보=홍수영 기자] “이 총알이 (내 총에 맞은 뒤 튀어서) 이 어깨뼈를 쳤어요. 갈비뼈가 열개인데 쪼르륵 여덟개가 또 부러졌어요. 그리고 아홉번째 가서 총알이 튕겨서 위로 올라왔어요. 위로 올라와서 심장에 와서 딱 마주쳐서 멈췄어요.”

6.25 전쟁 당시 총에 맞고도 목숨을 건졌던 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 지부장의 말이다. 

류 지부장의 갈비뼈들을 부러트린 그 총알은 지금도 여전히 심장 옆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렇게 류 지부장은 총알을 70년간 가슴에 품고 함께 살았다. 

류 지부장은 강원도 춘천 출신이다. 6.25 전쟁 발발 때에도 류 지부장은 고향에 있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는 장마였다. 새벽부터 쿵쿵 소리가 들리길래 천둥·번개가 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포 소리였다. 

북한군의 빠른 남하에 류 지부장 가족은 피란을 떠나지 못했다. 북한군은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인민재판’을 벌였다. 인민재판이란 공개된 장소에서 군중들을 모아놓고 조선노동당이 지명한 재판부로 하여금 형을 선고하는 재판을 의미한다. 류 지부장은 이때부터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북한군은 공출도 서슴없이 했다. 만일 원하는 만큼을 맞춰주지 못하면 북한군은 ‘반동’으로 간주했다. 북한군에 대한 반감이 한없이 커지는 가운데 북한군은 인민의용군으로 어린 학생들을 끌어내려고 했다. 류 지부장 등은 인민군이 되기 싫어 산에 숨어 지냈고, 마침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대반격에 나서자 고민 없이 북진 대열에 합류했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 지부장이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천지일보 2023.07.06.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 지부장이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천지일보 2023.07.06.

학도병이 된 류 지부장은 제대로 된 훈련과 군복도 없이 총 한자루만 받았다. 류 지부장은 혼자서 총을 분해·결합해보며 총 사용법을 스스로 익혔다. 

국군은 빠르게 진군했고, 압록강을 눈앞에 뒀다. 하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며 전세가 다시 바뀌었다. 수많은 동료가 붙들려 갔다. 류 지부장은 붙잡히지 않기 위해 꾀를 내야했다. 

류 지부장은 “중공군이 남쪽에만 서 있더라. 오히려 북쪽에는 놈들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압록강을 건너 북쪽으로 갔다”며 “11·12월이 되니까 아주 살얼음이 얼 정도의 추위인데, 살아야 하겠다 하는 마음이니 추운 것도 몰랐다”고 말했다.

이후 류 지부장은 ‘살수대첩’으로도 유명한 청천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국군 낙오자 수용소에 가게 됐고, 거기서 학도병이 아닌 정식으로 군에 입대했다. 류 지부장은 “천리 타향인데, 군인이 돼야만 양말이라도 하나 얻을 거 아니냐”며 이유를 설명했다.

학도병에서 ‘이등병’이 되자 대우가 완전히 달라졌다. 욕은 다반사였다. 그때 더 나은 월급을 받던 장교가 류 지부장 눈에 들어왔다. 당시 사병이 3000원을 받던 월급을 장교는 2만 5000원을 받았다는 게 류 지부장 기억이다. 이에 류 지부장은 장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시험을 쳤고, 합격했다.

소위가 돼 자신에게 욕을 하던 병사 앞에 섰던 기쁨도 잠시, 전쟁이 길어지면서 후방 생각이 간절해진 류 지부장은 광주 보병학교에서 초등군사반을 신청했다. 류 지부장은 당시를 ‘천당’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천당도 두달이 끝이었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 지부장 사무실에 있는 군복. ⓒ천지일보 2023.07.06.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 지부장 사무실에 있는 군복. ⓒ천지일보 2023.07.06.

전쟁이 계속되면서 소대·중대·대대 등 최일선의 부대를 이끌 위관급 장교의 씨가 말랐고, 후방에서 훈련을 받던 장교들을 차출하게 된 것이었다.

류 지부장은 “춘천 8사단 수색중대로 갔는데, 중대에 장교가 하나도 없었다”며 “같이 간 사람 중 고참 순으로 중대장, 1소대장, 2소대장, 3소대장을 나눴다. 내가 두번째로 고참이라 1소대장이 됐다”고 밝혔다. 

전선은 팽팽했다. 양측은 참호를 파놓고 대립했다. 누가 고개만 들었다 하면 총알이 날아왔다. 그래서 병사들은 최대한 숙이고 살아야 했다. 류 지부장은 “그래서 오줌도 앉아 보게 했다. 하지만 습성이 일어서서 누게끔 되지 않았냐”며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누다가 머리에 총알을 정통으로 맞아 죽기도 했다”고 전했다.

당시 군에 돌던 유행어가 있었다. ‘영혼탄’ ‘고생탄’ ‘행복탄’이 그것이다. 영혼탄이란 총알 한방에 숨을 거두는 상황을 의미했고, 고생탄이란 팔·다리가 잘린다든지 크게 다쳐 일생을 고생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을 의미했다. 행복탄은 총알이 몸을 관통해 후방 이송은 되지만 치료만 받으면 다시 멀쩡해지는 그런 부상 상황을 뜻했다. 이런 말이 돌 정도로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전투였다. 

이 전투의 이름은 ‘금성지구 전투’ 또는 ‘금성전투’로 명명됐다. 1953년 6~7월 강원도 화천에서 펼쳐졌던 이 전투는 양측 40만여명이 투입된 휴전 직전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전투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류 지부장의 ‘운명의 길’이 펼쳐졌다. 

때는 7월 13일. 중공군이 대공세에 나섰다. 중공군의 어마어마한 포격이 이어졌다. 류 지부장이 있던 참호 위로 총이 없던 중공군이 피리 소리와 함께 끝도 없이 넘어갔다. 아군은 탄막사격으로 대응했다. 류 지부장은 참호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1개 중대 167명에서 산 놈이 7명이에요. 중대에서 우리 소대원만 살아남았어요. 시체를 봤는데 그냥 온전한 시체가 없었어요.”

포격이 장맛비처럼 쏟아졌던 그날을 회상했던 류 지부장의 말이다. 이 참혹한 곳에서 살아남은 대가로 그는 중대장이 됐다. 이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중대장으로서 다시 빼앗겼던 땅을 찾기 위해 올라갔다.

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 지부장 가슴에 여전히 남아있는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총알. (제공: 류재식 지부장)
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 지부장 가슴에 여전히 남아있는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총알. (제공: 류재식 지부장)

이곳에 있던 화천발전소를 놓고 남북은 마지막 전투를 펼쳤고, 류 지부장은 406고지에 투입됐다. 

류 지부장은 “내가 뛰는 걸 잘했다. 100m 뛰듯 뛰어올라가니 중공군이 그냥 다 도망하더라. 근데 책임자 한놈과 내가 딱 마주쳤다”고 말했다. 둘 사이엔 잠깐 정적이 흘렀으나, 이윽고 서로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두 사람은 모두 쓰러졌다. 중공군 장교가 쏜 총알은 류 지부장의 총에 맞고는 그의 어깨뼈를 강타했다. 순간 그는 황천길을 경험했다. 목청 좋은 수탉도 만났다. 그러던 중 부대원이 그를 깨우면서 정신이 들었다. 겉보기엔 팔에서 피가 났다. 부대원들은 “중대장님 행복탄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군의관은 그가 죽는다고 봤다. 편히 보내준다며 모르핀을 잔뜩 놔주기도 했다. 그러나 류 지부장은 죽지 않았고, 옛날 기술로는 심장 인근 총알을 빼기 어려워 그대로 둔 채 상처를 꿰맸다. 그렇게 그는 휴전되는지도 모르는 채 휴전을 맞았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류 지부장은 금성전투 당시 함께했던 전우들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국립묘지에서도, 방송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총알과 함께 살아온 70년. 그에게 남은 목표는 살아남은 전우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여생을 보내도록 돕는 일이다. 2023년 참전명예수당은 한달 39만원. 한달을 살기엔 너무 빠듯한 금액이다. 

“70만원선까지는 받게끔 해서 하루라도 좀 편하게 살다 갔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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