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 

‘힙한’ 지역이 많아지고 있다. ‘1004섬’으로 정체성을 찾고 있는 전남 신안도 생태와 문화를 매개로 담대한 도전에 나서 주목받고 있다. 자은도 임자도 암태도 증도 압해도 등 여러 섬마다 각기 문화예술공간을 조성하는 야심 찬 운동을 펼치고 있다. 덕분에 몇 년 사이 범상치 않은 전시장, 박물관이 20여개나 생겼다.

예술과 꽃, 소금, 식물, 컬러 등을 활용한 지역 재생이 큰 성과를 거두자 2021년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 총회에서 ‘신안군 퍼플섬’을 제1회 유엔세계 최우수 관광마을로 선정했을 정도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같이 바다를 소재로 수많은 시를 쓴 이생강 시인(94)은 자신이 다닌 전국 2000여개 섬 중 신안의 우이도를 백미로 꼽았다. 필자는 최근 목포항에서 뱃길로 4시간 거리나 되는 우이도까진 가보지 못했지만 신안 지역 몇몇 섬을 돌아봤다. 섬 특유의 매력에 반하기도 했는데, 그보다 사람을 귀히 여기는 풍토가 더욱 놀라웠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어떤 인물을 기리느냐에 따라 도시의 품격이 달라진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신안이 바로 ‘인물 고장’ 같았다. 신안은 귀양 가면 불귀의 귀신 신세를 면치 못할 머나먼 오지의 섬이었다.

흑산도에서 16년간 유배 생활을 한 정약전도 끝내 섬에서 풀려나지 못한 채 해양생물 백과사전인 ‘자산어보’를 남기고 59세에 생을 마쳤다, 신안은 근, 현대까지 가난하기 짝이 없던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 절도범이 잡히면 먼저 ‘신안(당시 무안 소속) 사람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취급은 이제 옛말이고, 오히려 신안 사람들의 자긍심이 하늘을 찌른다. 임자도의 ‘우봉 조희령 미술관’에서 만난 신안 출신의 문화관광해설사는 관람객을 위해 자비로 선물까지 준비해놓고 작품 소개와 지역 자랑에 열성이었다.

추사체를 본받으며 난초와 매화 작품을 남긴 조선 후기의 문인화 대가 조희룡(1789~1866)은 임자도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그의 홍매도를 기증한 한 수집가(신안 출신) 덕분에 신안군은 우봉이 임자도에서 경험한 기록과 그림, 글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어 2년 전 우봉 조희룡미술관을 개관했다.

신안의 다른 문화공간도 ‘기증의 힘’으로 속속 문을 열고 있었다. 압해도 송공산 기슭 10ha(헥타르)에 자리잡은 ‘천사섬 분재공원’은 화재로 삭막해진 야산에 생태연못, 미술관, 야생화원, 조각공원, 분재원, 생태연못을 꾸몄다. 여러 분재 전문가의 기증과 조언을 계기로 걸출한 생태복합공원이 탄생된 것이다.

신안 다도해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분재공원을 거닐며 20억원을 호가하는 1500년생 주목나무를 비롯한 팽나무 소사나무 모과나무 향나무 해송 등 진귀한 분재를 구경할 수 있었다. 2시간 넘게 공원을 돌고 나니 눈 호강을 제대로 한 기분이 들었다.

자은도의 ‘1004 뮤지엄파크’에는 수집가 3명이 기증한 수석을 중심으로 ‘1004섬 수석미술관’과 ‘수석정원’을 조성해놓았다. 충북 제천과 단양, 남한강, 흑산도, 제주도 등지의 국내 희귀 수석과 중국 인도네시아 등 해외에서 사들인 정원석이 멋지게 배치돼 있었다.

바로 옆엔 색깔과 문양이 독특한 조개, 고둥을 전시한 세계조개박물관이 있었다. 임양수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장이 40년간 원양어선 선장 생활을 할 때 세계 각지에서 모은 걸 신안군에 기증했다. 수질정화 기능을 하는 조개, 고둥과 갯벌의 가치를 새삼 일깨워주는 전시 구성이었다.

증도에는 섬 이웃들에게 예수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다 한국전쟁 때 순교한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이 눈길을 끌었다. 암태도에는 1923년 일제에 대항해 1년에 걸쳐 소작농민항쟁을 벌인 역사적 사건을 알리는 기념탑이 항일운동을 기리고 있었다.

신안 사람들은 고향을 빛낸 걸출한 3대 인물로 김대중 전 대통령,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근대 1세대 서양화가 김환기, AI와 세기의 바둑 대전을 치른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을 꼽았다. 사람을 극진히 대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애지중지하는 소장품을 선뜻 기증하는 이들이 신안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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