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조선은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수용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전쟁을 하자는 척화파(斥和派)가 첨예하게 대립하니 새로운 차원의 당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인조(仁祖)가 척화파(斥和派)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상황이 돌변해 청태종(淸太宗)이 1636(인조 14)년 12월 2일 직접 군사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신호탄(信號彈)이 시작되었다.

한편 청나라의 이런 기습적인 침략에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조선의 조정(朝廷)은 당황하였으며 결국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이어서 인조를 비롯한 왕실이 피난을 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구체적으로 인조는 원래 강화도로 피난하려다가 청군이 길을 가로 막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비롯하여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하게 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비롯한 왕족들은 결국 강화도에 피신을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화도가 청군(淸軍)에 의하여 함락되면서 결국 인조도 대세가 기울었음을 인정하고 1637(인조 15)년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런데 병자호란의 결과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선양(瀋陽)에 소현세자와 강빈(姜嬪)을 비롯해 봉림대군과 신하들이 수십만의 백성들과 함께 볼모로 끌려갔으니 당시의 그 참상(慘狀)이 어느 정도 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소현세자는 볼모 생활을 하는 동안 실질적인 선양(瀋陽) 주재(駐在) 조선대사(朝鮮大使)의 역할을 원만히 수행하면서 청나라 관리(官吏)들과의 친분을 통하여 탁월한 외교감각(外交感覺)을 보여 주었으며, 강빈도 당시 조선의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사업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농사도 경작하면서 특히 당시 억울하게 끌려온 많은 백성들에게 경제적인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런 요소가 부정적으로 작용하여 강빈이 사사(賜死)되는 하나의 명분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1644년(인조 22)년 마침내 명나라가 이자성(李自成)의 난(亂)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며 결국 청나라가 베이징(北京)을 점령하게 되어 소현세자도 관소(館所)를 선양(瀋陽)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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