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필자는 얼마 전 고서화를 수장하고 있는 한 지인으로부터 250여년 전 일본 에도(江戶)시대 남화(남종화, 일본에서는 이렇게 호칭함) 한 점 고증을 의뢰받은 바 있다. 비단에 수묵담채로 그려진 그림은 일본 후지산(富士山)과 오래된 사찰 풍경이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조선시대 겸재 정선의 산수화처럼 우리 정서에 와 닿는 그림이었다. 작가는 이케노 타이가(池大雅, 1723~1776)로 일본 에도시대 작가 중 가장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작품 중 두 점이 일본국보로 지정됐으며 많은 작품이 중요문화재로 등재돼 있다.

그림은 후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지만 숲속에 옹립한 고층 탑, 그리고 법당의 건물은 한국에서 고찰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아마 작가는 나라지역에 있는 사찰의 모습을 상상해 그렸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케노 타이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피나는 노력으로 대가가 된 화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 도쿄 긴자에서 합죽선을 파는 장사를 하면서 많은 화가를 접하고 중국에서 오는 화가들과도 친숙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장성해서는 일본 전역의 명산을 자주 다녔다. 단짝 친구들과 어울려 후지산을 답사하고 이를 화폭에 담는 노력을 했다. 그가 일본 화단에서 명성을 얻을 당시 조선통신사 일행이 오사카에 도착해 교류할 기회를 얻었다.

조선통신사 일행 중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유성은 일본을 한번 다녀간 적이 있으며 그가 일본사찰에서 며칠 묵으며 그려준 강릉 낙산사 풍경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케노 타이가는 김유성에게 편지를 보내 만나줄 것을 간청한다. 조선 화원의 그림에 비해 자신들의 작품은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이케노 타이가의 질문은 후지산을 그리는데 어떻게 원근을 표현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실력 좋은 조선 도화서 화원으로부터 한수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정중하게 앉아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상정 된다. 이 자리에서 김유성은 후지산을 배경으로 한 상상도를 그렸다. 일본 측 자료를 보면 그때 이케노 타이가는 ‘신품(神品)’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조선 통신사 일행 가운데는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 예술가들이 있었으므로 일본은 이들을 우대하고, 행로에는 만나려고 애를 쓰는 지식인들로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오사카에는 매년 ‘왔소’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는 조선통신사들을 영접했던 당시 잔치 분위기를 재현하는 페스티벌이다. 이 축제는 조선과 일본의 문화교류 이상이었던 것이다.

김유성이 이케노 타이가에게 베푼 선의는 일본 화단에 충격을 줬다. 일본 화단은 조선화풍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화원 김유성 작품은 현재 일본에서 국보적 대우를 받는다. 이케노 타이가의 후지산 산수화는 김유성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것이어서 정감이 간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우리가 사대(事大)했던 나라가 아니다. 세종 때는 일본과 대마도, 유구국(지금의 오끼나와)에서 조공을 바쳤다. 일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사신을 보내 발전한 문화를 배우려고 애를 썼다. 사신을 보내 불경의 인출과 서적을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이런 문화적 갈증이 나중에 임진전쟁을 일으킨 이유였기도 하다.

야당이 윤석열 대통령의 일본 방문과 일련의 한·일 간 현안타결을 조공외교로 폄하하고 있다. 점점 꼬여가는 국제사회에서 과거사에 몰입해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만 살 수 없지 않은가. 조공외교란 말은 아무래도 적절하지 않은 표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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