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진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위원

시진핑 주석이 권력을 온전히 틀어잡은 공산당 20차 당대회가 끝나고 처음으로 열리는 정치협상회의가 4일 한국시간 오후 4시 개막했다. 이번 회의의 정원은 2169명이고 그중 2132명이 참석했다.

중국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대내외적 공식기구인 정협은 입법 기능과 의결권도 없다. 정당들만 모여 협의하는 단체 일명 정당 협의체도 아니다. 이름 있고 전문성 있는 민간인이 정협 의원인 경우도 있기에 제정파가 모여 토론하고 합의하는 제 정당만의 협의 모임도 아니다.

외부적으로 공개된 토론하는 모습을 봤을 때 새로운 법안을 논의한다든지 특정일을 가지고 인민들의 불편한 사항을 개선하자는 의견들을 심도 있게 나누는 장면들이 TV에 나오기도 한다. 공식적인 사무는 다음날 열리는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를 보좌하고 자문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중국만이 가지고 있는 정협은 모택동이 1949년 10월 1일 공산당 혁명으로 중국을 탄생시키기 전에 통일전술전략의 일환으로 만든 협상회의이다. 당시 공산당이 영도하는 전제하에 범 당파 연합의 성격과 현안에 대한 정치협상의 필요성을 느끼고 협상의 틀에 끌어들여 혁명 세력을 확충하고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 수행이 컸다.

당시에는 지금 있는 전인대회가 없었기에 또한 신중국 성립 전이기도 해서 공산당 주도로 전 인민을 형식적으로 대표하는 의회와 비슷한 기능도 수행했고, 중화 인민공화국 건국에 필요한 각종 제도를 만들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당적이 없고 인지도 있는 인사와 소위 민주정당을 자처하는 지도자 등 통제 가능한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자리를 줘, 신중국에 이렇게 많은 인사가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내세우는 전위병 역할도 성실히 수행했다.

중국 정협 1기 전체회의는 공식적으로 1949년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했다. 당시 마오쩌둥이 1기 주석을 했다. 당시 군권과 행정 사법권 등 전권을 가지고 있는 마오가 주석을 역임한 것을 봐도 지금보다 위상이 높았다. 1기 회의에서 신중국의 건국 기초작업을 했다. 중국의 국기와 국가 수도도 베이징으로 정하는 일련의 작업도 정협이 결의했다.

물론 후인 1954년 9월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정협이 의회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중앙 인민정주 조직법도 만들었다. 국가 틀이 갖춰지기 전에 뭔가 공식적으로 하긴 해야 할 시기에 이름 있는 모든 사람과 당파를 공산당 지도하에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만들어져 지금까지 존재하는 중국 유일의 제도이다.

개막식에서 이제 떠날 왕양 정협주석은 실토한다. “애국 통일전선 조직기구로서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고 내외적으로 중화의 아들딸이 중화민족 부흥에 매진하도록 힘을 모았다”고 자화자찬했다. 공산당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전제하에 비판보다 애국적 입장만을 견지하는 저명한 중국인이라면 모두 뽑아 참여시켜 거수기 역할을 지금도 하고 있다는 자평이다. 정협이라는 형식틀의 통제 가능한 체제 내에서 공산당의 목표만을 위해 전진하겠다는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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