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마이 웨이’.

12일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의 기조는 누가 뭐래도 소신껏 내 갈 길을 가겠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문고리 3인방’ ‘비선 실세 논란’ ‘소통 부족’ ‘개헌’ ‘인적 쇄신요구’ 등과 관련해 단호하고도 확고한 입장을 밝혔다. 검찰수사 결과를 보더라도 자신의 선택은 옳았으며 앞으로도 이 같은 입장을 계속 밀고나가겠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이로써 여론과 거리가 멀다는 등 정치권의 논란에도 불구, ‘박근혜식 마이 웨이’ 행진은 주저 없이 계속될 것 같다.

남북관계에 관한 언급도 대체로 마찬가지였다. 실망스럽게도 대북 ‘깜짝 제안’은 없었다. ‘5.24조치 해제’에도 부정적이었다. 가장 관심을 끈 부분이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것으로 온 국민의 시선이 쏠렸다. 이는 앞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최고위급회담도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한 데 따른 것.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박 대통령은 “평화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 필요하다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며 “전제조건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핵화 같은 게 전혀 해결이 안 되는데 평화통일을 얘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면 열린 마음으로 진정성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종전 입장인 ‘선(先) 핵포기 후(後) 남북대화’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즉 ‘선(先) 대화재개’ 입장이다. ‘공식 조건’이라고 토를 달지도 않았다. 다만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실질적인 ‘단서’로 ‘비핵화’와 ‘진정성’을 꼽았다고 할 수 있다. 남북한 정상이 비록 전제조건 없이 만나더라도 북한 핵문제가 반드시 진정성 있게 의제로 다뤄져야 한다는 언급이었다. 남북대화 의지를 분명히 하면서도 조급히 서두를 뜻은 없음을 확실히 밝힌 것이다.

다소 소극적으로 보이는 대북관련 언급은 이해할 만한 면도 있다. 무엇보다도 실무당국자 보다 굳이 앞서 나가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된다. 전략적 언급인 것이다. 북한에 공을 다시 넘기면서도 당국자 사전대화에 힘을 실어준 모양새다. 필자 개인 견해이지만 남북 간에는 지금 어디선가 비공개접촉을 통한 밀고 당기기가 진행되고 있다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얼마 전 ‘사전 대화’에 대해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가능성을 열어둔 발언도 있었다. 사실 외교관례를 보더라도 ‘사전 담판’이나 ‘비밀 회담’을 통한 치밀한 준비 없는 ‘서밋 토크(summit talks)’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상황에서 ‘5·24조치 해제’나 ‘금강산관광 재개’ 같은 협상 보따리를 대통령이 먼저 꺼내 풀어버리면 협상이 안 된다. 우리 쪽이 손에 들고 있는 ‘패’를 미리 다 공개해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말이다. 다만 남북 양측이 서로의 입장을 배려하며 대승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자세로 대화에 임했으면 한다. ‘사전 접촉’ 결과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이에는 최근 미국의 대북제재 조치가 있었고, 이달 중 북미핵협상 개최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감안된 듯하다. 그렇다면 북미핵협상과 미국의 대북 압박 전술이 남북관계 개선에 찬물을 끼얹을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은 없느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 때문인지 신년기자회견 직후 마크 리퍼트 주한 미 대사는 트위터에 “미국은 박 대통령이 남북관계에 대해 내놓은 제안들을 환영한다”며 “이런 제안들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조치라고 믿는다”고 써 눈길을 끌었다. 오히려 미국 대사의 언급 자체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이는 어쩌면 우리 정부가 미국 눈치를 보고 있다는 반증 아니겠는가. 외교통상부 주변에서는 ‘슈션 보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굳이 설명하자면 ‘사대주의적’이고 ‘친미 굴욕외교’에 치중하는 외교관을 비하해 꼬집는 말이다. 미국통으로 외교가 주요 보직을 독점하면서도 미국이 어쩌다 헛기침 한 번만 하면 애써 독감에 걸린 시늉을 하는 듯한 이들을 빗대 말한 것이다. 그만큼 한국 외교에 미치는 미국 영향력이 종래 절대적이었다는 뜻이겠지만, 지금도 과거와 마찬가지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당당하고 떳떳해야 할 남북관계 개선 노력이 만에 하나라도 미국의 ‘헛기침’에 의해 ‘낮은 포복’으로 굴절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문제는 남북이산가족 상봉이다. 인도적 차원에서 계속 이어져야 한다. ‘딜(deal)’의 대상이 돼서야 되겠는가. 설 명절에라도 학수고대해온 상봉이 꼭 이뤄져야 한다. 70년간 서로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원통하게 살아온 이산가족들의 자연수명을 고려하면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6.15남북정상회담 이후부터 지금까지 총 19회, 화상상봉이 7회 있었다. 매년 두세 차례씩 이뤄진 상봉은 천안함 연평도 서해교전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며 2008년, 2011년, 2012년, 2013년에는 건너뛰었다. 통계상 이산가족상봉 신청자는 12만 9287명. 이 중 생존자는 7만 1503명, 사망자는 5만 7784명이다. 벌써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고, 곧 사망자수가 생존자수를 넘을 전망이다.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20차 이산가족상봉, 더 이상 외면되거나 지체돼서는 안 된다. 시간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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