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봉길 의사의 친조카인 윤주 매헌기념관장이 이봉창 의사 전기집을 들고 있다. 이 전기집은 윤주 관장의 선친이자 윤 의사의 친동생인 윤남의 선생이 출판을 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건국훈장 2등급→1등급 올려야, 생가복원 꼭 필요”
일본 천왕에 폭탄 투척, 의거는 실패했으나
잠자고 있던 우리의 독립의지를 드높인 쾌거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 하면 31년 동안 인생 쾌락을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 쾌락을 도(圖)키 위해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을 목적하고 상해로 왔습니다.”

“나는 영원 쾌락을 향(享)코저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양인이 희열한 안색을 띄고 사진을 찍읍시다.”

나 역시 미소를 띄우고 사진을 찍었다.

-백범일지 중에서-

▲ 1931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마치고 찍은 이봉창 의사 사진 (사진제공: 이봉창생가복원추진위원회)

일제의 탄압과 억압으로 독립항거는 잠잠하고 암울하던 일제강점기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 일본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군중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무리 틈에서 숨을 죽인 채 일왕이 자신의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한 청년. 일왕이 탄 마차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자 청년은 지체 없이 속주머니에 숨겨놨던 폭탄을 힘껏 던졌다.

일본인들에게 현인신(現人神)으로 추앙받는 존재인 일왕에게 누가 감히 폭탄을 던질 거라 생각했겠는가. 요란한 폭음과 연기로 주변은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폭탄은 일왕을 빗겨간 채 수행하던 사람과 말만 부상을 당했다. 안타깝게도 의거는 실패로 끝났고, 청년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결국 옥고를 치르다 그해 10월 10일 교수형으로 만32세의 젊은 생을 마감했다.

이 청년은 바로 이봉창 의사다. 일본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일왕을 제거하고 조선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고자 죽음의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던 이봉창 의사. 비록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잠자고 있던 우리의 독립의지를 깨웠고, 이는 훗날 윤봉길 의사의 의거(1932. 4. 29) 등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의 활발한 항일 독립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어쩌면 이 의사의 의거는 실패가 아닌 성공이었는지 모른다. 일왕을 응징하려 했다며 최고의 대역죄를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그는 우리의 처지와 비슷하던 중국인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큰 힘을 주게 된다.

▲ 한인애국단 단원으로서 적국의 수괴를 도륙할 것을 맹세한 이봉창 의사의 선서문 (사진제공: 이봉창생가복원추진위원회)

◆ 추모 82주기, 저평가된 공로와 업적 재평가돼야

지난해 10월 10일은 애국지사 이봉창(1900.8.10~1932.10.10) 의사의 서거 82주기였다. 서울 용산 효창공원 이봉창 의사 묘전 앞에서 추모식이 진행됐다. 용산구 관내 기관장들은 다 빠진 채 조촐하면서도 다소 초라한 분위기 속에 마쳤다. 이곳에 모인 여러 민족단체장들은 “이 의사의 고귀한 순국이 없었다면 윤봉길 의거나 여러 독립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며 하나같이 저평가된 이 의사의 공로와 업적이 재평가돼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 가운데서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가 지금 있기까지 모든 과정에 기여한 윤주 매헌기념관장을 기념관에서 따로 만나 이봉창 의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 지난해 10월 10일 82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윤주 관장(오른쪽) ⓒ천지일보(뉴스천지)

기념사업회 발족하기까지의 우여곡절 과정

윤주 관장은 윤봉길 의사의 친조카이자 이봉창의사생가복원추진위원회 부회장이다. 윤 관장의 아버지인 윤남의(윤봉길 친동생) 선생은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를 1965년 설립하고 활발한 추모사업을 펼쳤다. 그에 비해 이봉창 의사는 1975년까지 어떠한 추모식이나 기념식이 따로 없었다. 1946년 5월 15일 윤봉길, 백정기 의사 유해와 함께 일본에서 발굴, 부산으로 봉안돼 오면서 추모제를 지냈고, 그해 7월 6일 해방 후 첫 국민장으로 모셔진 뒤 효창공원에 묻히게 된 게 전부였다.

상황이 이러하자 윤 관장의 선친은 이봉창 의사의 의거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추모식과 기념사업회 발족을 제의했고,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원 주축으로 이봉창의사추모위원회를 구성해 이를 추진해 나간다. 당시 청년이었던 윤 관장은 심부름을 주로 하며 도왔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낼 탄원서의 초안을 작성했다. 탄원서에는 이봉창 의사의 비석조차 없고, 추모식 없는 현실을 담았다. 윤 관장은 “박 대통령이 탄원서를 받아보고 난리가 났다. 최규하 국무총리를 시켜 44주기를 맞아 첫 추모식을 성대하게 치를 수 있도록 도왔다”고 말했다.

이 추모식이 시초가 돼 윤 관장 선친은 남은 찬조금을 이봉창 의사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입금시키라고 지시해 계속해서 기념사업회 발족을 위한 노력에 발 벗고 나선다. 그의 선친은 추모사업을 위해 수년간 빈병과 깡통 등의 폐품을 주워 모아 팔았고, 그 돈은 고스란히 이 의사 명의 통장에 입금시킬 정도로 열성이었다. 윤 관장은 “당시는 실명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의사 명의로 통장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고, 도장은 선친 이름으로 했다. 이 통장은 아직도 보물처럼 잘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 얼굴이 가려진 채 일본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일본 재판장으로 들어가는 이봉창 의사 (사진출처: 이봉창 의사 전기집)

애국지사들의 기념사업회가 몇 군데 밖에 되지 않아 1978년 이봉창의사추모위원회를 해산하고 동시에 효창원순국선열추모위원회를 구성한 뒤 1979년 4월 13일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맞아 효창원 7위선열(김구,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임시정부요인 4인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의 첫 합동추모식을 지낸다. 그리고 윤 관장의 선친과 김재홍 선생의 꾸준한 선양사업으로 1981년 이봉창기념사업회가 드디어 발족됐다.

이봉창 의사가 거사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애국지사로서는 국민적 관심이 적었기에 윤 관장 선친은 이 의사 자료를 수집해 1992년 위인전기집을 발간한다. 이 의사의 의거를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읽기 쉽게 아동용 도서로 출판했다. 이로 인해 언론과 국민들의 관심을 얻었고, 각계각층의 도움을 얻어 1995년 동상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운영의 어려움으로 1997년 기념사업회가 없어졌다가 2001년 다시 부활시키고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윤 관장과 그의 선친을 중심으로 한 노력이 없었다면 이봉창 의사는 더 관심 밖으로 묻힐 뻔 했던 것이다. 2013년 생가복원추진위원회를 설립해 생가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이 의사 생가 터에는 비석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다.

▲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이봉창 의사 묘전 앞에서 지난해 10월 10일 82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이봉창 의사 더 알리기 위해 순국 전 사진 공개

지난해 윤 관장은 이봉창 의사의 순국 열흘 전 사진을 공개했다. 1932년 9월 30일자 日아사히신문에 실린 사진이며, 그 옆에는 ‘대역범인 이봉창(상) 그의 생가(우하)와 도쿄에 있는 숙박 장부에서 확인한 필적’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윤 관장은 3년 전 발행한 윤봉길의사 전집 발행과정에서 해외를 다니며 자료를 정리하다가 나온 것이라 말했다. 이 의사의 서거 82주기를 맞아 그를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성을 느껴 공개하게 됐고, 아직도 이 의사의 업적은 다른 독립운동가에게 묻혀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 관장은 “사진만 봐도 양쪽 볼이 앙상한 게 상당히 수척한 얼굴이다. 심한 문초를 겪은 것을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라며 “호외에는 이 의사의 생가 사진과 도쿄 숙박지에 남긴 이 의사의 필적 사진도 함께 실렸다”고 설명했다.

▲ 윤주 관장이 최근 공개한 이봉창 의사의 순국 전 사진. 1932년 9월 30일자 日아사히신문에 실린 사진 (사진제공: 매헌기념관) ⓒ천지일보(뉴스천지)

윤 관장이 이봉창 의사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꺼져 가는 임시정부와 조선의 위상을 살렸다는 데 있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됐는데, 파벌싸움에다 재정이 어렵게 되자 독립운동가들이 다 떠나는 상황에서 이봉창 의사는 일본에서, 윤봉길 의사는 시골에서 각각 자발적으로 임시정부를 찾아갔다는 점이다. 특히 이 의사는 일본인들의 심장이자 제국주의의 상징인 최우두머리를 제거하려 했다는 점에 존경스러워 했다. 비록 의거는 실패했으나 파장이 엄청났고, 당시 세계에서 존재 자체를 인식 못했던 한국의 존재와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게 윤 관장의 설명이다. 아울러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의 불씨를 살렸고, 이는 윤봉길 의사의 거사로도 이어질 수 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또 이 의사는 무대포로 일왕을 제거하기 위해 무작정 나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치밀한 계획을 짰다.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고, 일본인 행세를 하며 법망에 빠져 나가기 위해 주요 관직에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며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는 안됐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일왕 제거 의사를 밝히며 도움을 요청했고, 김구 선생 역시 어려운 재정 여건에서도 많은 돈을 들여 폭탄을 비롯한 일본까지 가는 비용을 제공했다. 거사를 앞두고 이봉창 의사는 환하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은 안중근 의사의 친조카인 안낙생이 찍었다. 마음 아파하는 김구 선생을 오히려 위로하면서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간다”면서 기쁘게 같이 찍자고 했다. 당시 이봉창은 결혼도 안한 32살의 청년이었다. 설사 성공할지라도 죽을 것을 알고 각오한 거사였다. 그리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 의거를 앞두고 선서문을 가슴에 붙이고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출처: 이봉창 의사 전기집)
▲ 윤봉길 의사는 이봉창 의사 의거(1932. 1. 8) 이후 3달여 만인 4월 29일 상하이 도시락폭탄 의거를 성공시킨다. (사진제공: 매헌기념관)

건국훈장 재심사, 생가복원 꼭 필요

그럼에도 이봉창 의사는 건국훈장 2등급을 받았다. 윤 관장은 이 의사의 의거가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으로 평가한다면 1등급 이상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사 때 1등급에 오른 사람이 30여명인데, 이 의사는 아마도 의거가 실패했다는 이유로 2등급을 받은 듯하다. 윤 관장은 “당시 어떻게 평가했는지 모르지만 심사가 잘못됐다. 재심사를 위해 여러 차례 국가보훈처에도 청원서를 올렸는데 답장이 오길 ‘어느 개인만을 위해서는 심사를 다시 할 수 없다’는 공문 답변이 왔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속히 1등급으로 올려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아울러 흔적조차 사라져가고 있는 이봉창 의사의 생가 또한 복원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의사가 독립운동사에 준 영향을 생각한다면 기념관 하나 제대로 없고 너무나 초라하다. 스포츠를 빗대자면 경기결과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땀 흘리고 피나는 훈련 과정 역시 결과 못지않게 인정하고 박수를 쳐줘야 한다. 이봉창 의사가 행한 의거 의미도 그런 맥락에서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싶다.

김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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