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사의 산 증인으로 불린 방지일 목사가 지난 10일 새벽 0시 20분에 노환으로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소천했다. 그는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 경책의 메시지를 아끼지 않았다. 지난 2013년 3월 31일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한국교회 부활절연합예배에서 방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다(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던 고(故) 방 목사의 빈소 모습(아래). 천지일보DB ⓒ천지일보(뉴스천지)
한국교회史 증인 향년 103세 소천… 애도 메시지 줄이어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120여 년 되는 한국교회사의 산 증인으로, 부패한 목회자들을 향한 경책을 아끼지 않았던 최고령 어르신 방지일(사진) 목사가 지난 10일 새벽 노환으로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소천했다. 향년 103세.

지난 9일 방지일 목사는 야외 활동을 하던 중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한국 개신교의 큰 어르신으로 연합과 일치에 대한 교훈을 아끼지 않았던 방 목사의 별세 비보에 빈소에는 교계‧정계 인사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방 목사는 103세의 고령에도 한국교회를 향해 회개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고 이달 초에는 북한 선교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는 등 활동을 쉬지 않았다.

지난 7월에는 부패된 한국교회의 회복을 염원하며 한국기독교원로목사회와 한국범죄예방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회초리 기도회’에도 참석할 의지를 보였다. 당시 건강상의 이유로 현장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포스터를 제작하며 지팡이에 의지하는 안타까운 모습으로 회초리를 들고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종아리를 내려쳤다. 방 목사는 생애 말년 이같이 썩어가는 한국교회를 향해 애정이 담긴 따끔한 경책을 아끼지 않았다.

비보가 알려진 10일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 이영훈 목사, ㈔방지일목사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삼환 목사(명성교회, 통합 증경총회장), 유의웅 목사(도림교회 원로, 예장통합 증경총회장), 림인식 목사(노량진교회 원로, 예장통합 증경총회장)가 방문하는 등 교계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저녁 시간에 빈소를 찾았다.

빈소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등 주요 인사들이 보낸 화환이 가득 들어찼다. 고인의 뜻에 따라 유족들은 조문금을 받지 않았다.

11일 입관예배에 이어 발인예배는 14일 오전 9시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 한국교회 향한 회개의 외침

“한국교회 강단이 구약 대제사장들이 지성소를 드나들 때 주의했던 것보다 못한 것 같아 (하나님 앞에) 매우 송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떠나시며 우리를 외로운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보혜사를 보내 영원히 함께 있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지난해 3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2013부활절연합예배에 참석한 방 목사는 부패한 목회자들로 더렵혀진 강단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날렸다. 아울러 이들을 싸맬 수 있는 존재가 오직 보혜사임을 강조했다.

올초에는 “통회 자복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많이 보지만 말로만 그치는 일이 많은 것 같다”며 “회개의 눈물은 내가 각성함으로 흘리는 (개인적인 차원의) 눈물의 정도가 아니다. 보혜사의 역사 아래서 흘리는 회개의 눈물을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기신다”고 조언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닌 실천에 옮기는 신앙을, 성령의 역사 아래 진정으로 회개하는 성결한 신앙을 한국교회에 요구했던 것이다.

◆ 1세기 한국교회 변천사 목격한 ‘증인’

방 목사는 1911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초기 개신교를 받아들여 신앙의 가문을 세운 할아버지 방만준과 이어 목사가 된 아버지 방효원에 이어 3대를 이어간 신앙인이었다. 일제 치하 당시 보기 드문 개신교 집안이었다. 1929년 평양숭실대학교에 입학했고, 정오리교회를 개척했다. 1933년 대학을 졸업한 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입학했고,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근무했다.

이 교회는 평양대부흥을 이끌었던 길선주 목사가 원로목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1937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아버지 방효원 목사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던 중국 산둥성에 선교사로 파송됐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화로 추방됐다. 당시 일제가 만든 대동화선교회에서 가입을 강요했지만 거절했다.

1957년 중국은 방 목사를 북한으로 추방하려고 했으나 서방 언론에 ‘중국에 남은 마지막 기독교 선교사’라고 보도되면서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됐다. 귀국한 후 영등포교회에 부임해 1979년까지 담임목사를 지냈다.

방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 총회장과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교회연합(한교연) 명예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손양원, 한경직, 박윤선 목사 등과 함께 한국교회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로 인정받고 있다.

◆ 교계 애도메시지 줄이어

한국교회언론회는 고인의 삶에 대해 “복음에 대한 열정, 주님 앞에서의 ‘내려놓음’과 ‘비움’의 삶을 늘 실천하셨다”며 “소통에 힘쓰셨고, 한국교회에 대한 애정 어린 가르침과 충고도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교회언론회는 “이러한 삶은 이 시대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교연은 성명을 통해 “한국교회의 존경받는 큰 어른을 잃었다는 슬픔과 애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면서도 “고인이 한국교회에 남긴 보석같이 빛나는 발자취가 헛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세계 선교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품는 건강한 한국교회가 되는 일에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한국기독교언론포럼 이사장 김지철 목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추모의 글을 올리고 방 목사에 대해 “한국교회의 자랑이며 동시에 후배들의 축복이었다”고 추앙했다. 그는 고인의 어록인 ‘녹스는 게 두렵지, 닳아 없어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라는 말을 인용하며 후배 목회자로서 그 뜻을 이어갈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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