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

 
1992년 한·중 간 외교관계 수립으로 대륙의 빗장이 열리자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이들 중 상당한 지식인들은 한국의 전통현장에 살아있는 유풍(儒風)에 놀라고 말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왕실의 ‘종묘제례(2001.5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였다. 그 장중한 음악과 참례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이들은 한국을 다시 보게 이르렀다.

“당(唐)시대의 공부묘(孔府廟) 제례 음악이 한국에 남아있다니….” 감탄한 중국 정부는 특별히 전문가들을 한국에 보내 종묘제례를 배워 단절된 제례악을 복원했다고 한다.

명나라가 망하고 북방 유목민족인 청나라가 세워지자 당시 대륙에서는 중국의 유학(儒學)이 조선으로 옮겨졌다고 개탄했다. 청나라의 유학은 침체일로였으나 조선 지식인들의 유학에 대한 열정과 숭상은 더욱 빛났던 것이다.

조선 후기 최고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부친을 따라 수행원으로 연경(北京)에 간다. 남다른 탐구심과 지식에 목말라 있던 추사는 뒷골목 색주가에서 술과 미인을 찾는 대신 역관(譯官)을 데리고 연경의 지식인을 만났다. 당시 청나라 최고의 명필이자 유학자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은 젊은 추사의 방문을 받고 주로 필담으로 대화를 나눴다. 추사의 질문과 글씨를 보는 순간 옹방강은 눈을 의심했다.

“이 젊은 조선의 선비는 누구인가. 글씨마저 비범하다니. 이런 젊은 선비들이 조선에는 많다는 것인가?” 당시 조선에서는 추사보다도 학문이 깊은 학자, 명필들이 많았다. 추사는 한창 학문을 배우고 글씨를 연마하는 청년시기였다. 옹방강이 조선을 방문했다면 더욱 놀랐을 게다. 퇴계, 율곡, 우암의 학통을 이은 석학들이 조선에는 가득 차 있었다.

추사보다 170년 전 인물인 우암은 조선 유학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거유(巨儒)라는 칭호를 받는다. 우리나라 유학자 가운데 자(子) 칭호를 받는 이는 우암이 유일하다.

우암은 만년에 벼슬을 외면하고 화양동에 은거하여 별업(別業)을 삼았다. 임금은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고 상경할 것을 요청했으나 사양했다. 화양동을 주자학의 성지로 조성, 필생의 사업인 대명의리(對明義理)의 상징으로 만들기 위함이었을까. 친구인 민정중(閔鼎重)이 중국을 다녀오면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 ‘非禮不動(비례부동-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를 구해오자 우암은 이를 화양구곡의 하나인 첨성대(瞻星臺) 바위에 각자한다.

또 선조의 친필 ‘만절필동(萬折必東)’을 각자했는데 ‘중국의 강물이 꺾이기는 해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우암의 의지로 화양동에 복원된 만동묘(萬東廟)는 ‘만절필동’의 처음과 끝 자를 따온 것으로 과거 조선과 명나라를 연결해 주는 보은의 징표다.

우암은 사후 325년 한국과 중국의 변화를 미리 예견한 것은 아닌가. 괴산 화양동과 우암 유적은 한·중 간 우호협력을 연결해 줄 역사적 고리로 부상하고 있다. 우암 정신은 한국과 중국 국민들에게 의리와 신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유학사상이 붐을 이루고 있다. 소외받았던 공자의 동상이 광장 중앙으로 옮겨지고 논어가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중국 시진핑 주석은 ‘공자 탄생 2565주년 국제학술대회’에 참석 “중화민족은 공자와 유교의 전통 사상을 바탕으로 앞으로 평화의 길을 걸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부패와 전쟁 중인 시진핑 주석은 물욕에 초연한 유학 사상을 지도층의 이념으로 삼으려하는 것 같다.

최근 성균관대학이 우암의 친필인 ‘대자첩(大字帖)’을 공개했다. ‘부귀는 얻기 쉬우나 명예와 절개는 지키기 어렵다(富貴易得 名節難保/부귀이득 명절난보)’는 뜻의 이 글씨는 총 7m 길이로 한국에서 가장 큰 글씨라고 한다. 주자대전 54권에 나오는 명구로 부패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 양국 사회에 주는 고언 같아서 가슴에 와 닿는다.

한·중 보은의 역사유적 괴산 화양동을 잘 가꿔 많은 중국인들이 찾는 유학의 성지이자 관광지로 발전시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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