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칼럼니스트·대기자)

 
중국 복건성에 있는 무이구곡(武夷九曲)은 기묘한 경치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이 명승은 송나라 주자(朱子)의 고향으로 그가 노래한 ‘무이구곡가’는 불후의 명시로 회자된다. 1곡에서 9곡까지 아름다움에 대한 소회가 절실하여 신선의 경지에 빠지게 한다.

옛 조선의 석학들이 경승지에 구곡(九曲)을 지어 찬탄한 것은 주자의 멋진 유풍을 닮으려 한 때문이다. 전국에는 구곡이름이 붙여진 경승지가 많으며 퇴계는 도산구곡을, 율곡은 고산을 사랑하여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다.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은 괴산 화양동을 별업으로 삼아 화양구곡(華陽九曲)을 경영했다. 우암은 화양에서 주자를 지극히 숭모하여 성리학의 최고봉임을 입증하는 송자(宋子)라는 칭호를 받기에 이른다.

중국대륙과 우리 한반도에 구곡을 붙인 명승이 많다고 하나 어디 화양구곡의 경지에 비견하랴. 화양 9곡은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이다.

1곡 경천벽은 기암의 경관이 하늘을 떠받치듯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곡은 운영담으로 구름의 그림자가 맑은 물에 비친다는 뜻이며 3곡 읍궁암은 우암이 효종의 승하를 슬퍼하여 새벽마다 통곡하였다는 바위다. 4곡 금사담은 맑고 깨끗한 계류 아래로 금싸라기 같은 모래가 흐른다고 명명한 것이다.

5곡은 바위의 모습이 층단을 이룬 것 같다하여 첨성대라 부르며 명나라 황제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다. 큰 바위의 크기가 열 길이나 된다는 능운대는 6곡, 바위형상이 꿈틀거리는 용을 닮았다는 와룡암은 7곡, 백 마리 학이 모여들었다는 학소대는 8곡이다. 9곡은 흰 바위가 옥과 같다 하여 파천(巴串)으로 불린다.

우암은 화양구곡을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 성지로 조성하려 한 것인가. 노봉(老逢) 민정중(閔鼎重)이 중국을 다녀오면서 귀하게 얻은 명나라 의종의 어필 ‘비례부동(非禮不動)’이란 대자를 첨성대 바위에 각자했다.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 명구는 공자의 수기철학가운데 가장 근본 지침이다. 또 선조임금의 글씨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글씨를 절벽에 각자했다.

우암은 화양구곡을 경영하면서도 마음속에 품고 있던 숙원을 이룩하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임진전쟁당시 조선을 도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망각하지 않는 기념비적 만동묘(萬東廟)의 건립이었다. 만동은 ‘만절필동’의 줄임말로 ‘황하는 만 번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섭리를 함축한 것이다. 우암은 적소 제주도에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귀경하던 중 정읍에서 사사(賜死)되면서 임종한 제자 권상하에게 만동묘 건립을 유명으로 남겼다.

왜 우암은 화양동에 만동묘라는 대명의리의 표상을 세우라고 유명한 것일까.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의리라고 하지만 청(淸)에 대한 문화적 저항이며 민족의 우월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만동묘는 청나라 지배 하에서도 약 2백년간 제향을 올리게 된다. 명나라 황제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는 사실을 안 청 조정은 분노했지만 그때마다 구실을 붙여 훼철되지 않았다. 조선말 대원군이 이곳 토착 양반들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분풀이로 헐렸다가 지난 2008년에 복건된 것이다.

화양구곡이 최근 우리나라에서 제일먼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名勝)’으로 지정 되었다. 이는 괴산군은 물론 충북도의 경사다. 이곳은 최근 입소문을 타고 충북을 여행하는 중국인들이 찾고 싶은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이들은 만동묘와 화양구곡을 돌며 끈끈한 역사적 유대를 알게 되고 화양구곡의 아름답고 깨끗한 모습에 감탄한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명승 화양’에 내국인과 중국인들이 쉬어갈수 있는 문화 예술 공간이나 박물관, 호텔, 차이나 타운, 아울렛등 관광시설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중 간 경제, 문화적 교류가 확대되는 차제에 만동묘 역사 유적이 한국의 관광위상을 높여 줄 격조 높은 대안으로 부상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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