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

 

백강(白江)은 고대 사서에 나오는 강 이름으로 금강 하류로 비정된다. 삼국사기와 중국사서에는 백강구(白江口), 일본서기에는 백촌강(白村江)이라고 기록된다. ‘백강’이 왜 외국 사서에까지 등장하는 것일까.

660AD 백제는 18만 나·당연합군에 의해 수도 부여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했다. 의자왕은 황망히 웅진으로 피난 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그리고 궁전에서 신라왕 김춘추, 태자 법민, 그리고 김유신 장군, 당장 소정방 아래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바치는 항복의식을 거행한다. 이 굴욕의 현장을 지켜본 많은 백제 유민은 통곡하며 분노했다. 그리고 신라의 백제 정복을 인정하지 않은 복국(復國, 부흥운동)전쟁을 감행하게 되는 것이다. 백제 유민은 당시 일본에 있던 왕자 풍(豊)을 급히 환국시키고 주류성(周留城)을 임시 왕성으로 삼아 치열한 대 신라전쟁을 치르게 된다.

임존성(예산)을 비롯한 두량윤성, 가림성 등 백제의 여러 성이 합세해 잃어버린 땅 대부분을 회복했다. 백제전사들은 웅진도독부 등 심장부를 공격해 이곳에 있던 당나라 군대에게 큰 고통을 주기도 했다. 신라는 위기를 느끼고 복국전사 소탕작전을 수행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주류성에 웅거했던 풍왕은 세력이 커지자 평지를 택해 수도를 정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위기를 느낀 신라는 백제의 복국운동의 거점인 주류성을 정복하기 위해 당나라 군사의 지원을 받아 총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풍왕은 이런 총공세가 예상되자 왜왕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당나라는 서해를 통해 다시 대군을 파견했으며, 신라군은 수만 정예기병을 앞세워 백강을 향했다. 신라군과 당군은 강의 안상(岸上)에서 왜국군의 상륙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들이 백강어구에 들어오자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일본서기는 당시 백강전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唐)나라 장군이 전선 170을 이끌고 백촌강에 진을 쳤다. 일본의 수군 중 먼저 온 군사들과 당 수군이 대전했다. 일본이 패해 물러났다. 당은 진을 굳게 해 지켰다. 일본의 제장과 백제의 왕이 기상을 보지 않고 ‘우리가 선수를 쳐서 싸우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고 말했다. 다시 일본이 대오가 난잡한 중군의 병졸을 이끌고 진을 굳건히 한 당의 군사를 나아가 쳤다. 당은 좌우에서 군사를 내어 협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倭)이 적에게 패했다. 물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 박시전래진(朴市田來津)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이를 갈며 수십 인을 죽이고 마침내 전사했다. 이 때 백제왕 풍은 몇 사람과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피했다.”

한 연구논문은 이 백강전투에서 조우한 백제 복국군과 왜국 지원군, 나·당연합군의 수를 약 19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가장 많은 국가와 군사가 참전, 수만 명이 전사한 동북아 최초의 대전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왜 백제는 3년 넘게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가장 극렬하게 저항했으며 왜군의 지원까지 받아 백강전투를 수행했던 것인가.

고대 신라는 백제로부터 많은 기술과 문화적 지원을 받는 등 삼국 중 가장 발전 속도가 늦었다. 황룡사(黃龍寺)의 대역사에도 백제의 일급 장인을 초치해 공역을 완성할 정도였다. 군사력 면에서도 백제는 신라보다 우위의 입장에 있었다. 아시아 최강국가를 이룩하려 했던 백제의 자존심이 약체 신라에 의해 무너진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백강은 지금 서천과 군산을 잇는 금강 하구둑과 은빛 갈대밭이 장관을 이룬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로 비정된다. 이 땅 곳곳에 1400년 전 수만 명 전사의 유해가 묻혀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부모 곁을 떠나 희생된 젊은 고혼이 아닌가. 그러나 드넓은 강변 어디에도 이들의 넋을 달래줄 비석마저 안 보인다. 지금 백제잔영이 어린 한산, 여기마저 외롭게 죽어간 전사의 영혼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왜 이리 각박한 민족이 됐을까. 위대했던 백제, 고마나루는 섬나라 왜인의 정신적 고향이며 선망의 땅이었다. 잃어버린 백제를 살리는 것이 한국 역사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이며 역사의 소명임을 깨달아야 한다(글마루 2014년 11월호 특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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