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참전유공자회 양태성 노원구지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6.25참전유공자회 양태성 노원구지회장
통신 발달하지 못해 발생한 오인사격으로
적군기보다 아군기에 의한 공격이 더 많아

[천지일보=임문식 기자] “쉬익 쉬익~” “두두두두”

고막을 찢는 듯한 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이윽고 콩 볶는 듯한 기관총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전투기의 기총사격이 시작된 것이다.

“쌕쌕이다”

화차 위에 있던 병사들은 위험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피할 겨를이 없었다. 전투기로부터 날아든 총알이 비 오듯 했다. 각종 탄약을 실은 화차엔 불꽃이 튀었고, 바닥엔 흙먼지가 일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당시 탄약병이었던 양태성(84) 6.25참전유공자회 노원구지회장은 탄 박스 사이로 머리를 숨겼다. 그는 무사했지만, 옆에 있던 동료는 변을 당했다. 폭탄 파편이 배를 뚫고 지나갔다.

64년 전 6.25 전쟁 때의 일이었다. 양 지회장은 동료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탄약부대에서 복무했던 양 지회장은 이런 공습을 자주 당했다고 했다. 그의 동료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공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아군 전투기에 의한 것이었다. 이른바 ‘호주 쌕쌕이’로 불리는 제트기였다. 통신이 발달하지 못해 발생한 오인사격이었다.

그는 “적군기보다 아군기에 의한 공격이 더 많았다”고 말했다. 외국인 출신 조종사가 적군과 아군을 잘 구분하지 못해 이처럼 한국군을 공격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양 지회장이 속했던 탄약부대는 철로를 따라 이동했다. 인민군의 진격에 따라 작전상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국군 부대에 탄약을 보급하는 게 주된 임무였다. 그러다 보니 적의 제1차 공격 목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생사를 넘나들었다. 화차에 실린 포탄이 언제 적의 공격을 받아 폭발할지 몰랐다. 포탄을 안은 채 6.25 전쟁을 보낸 셈이다.

그런 만큼 안타까운 마음도 있다. 6.25 전쟁이 보병 위주로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양 지회장은 “6.25 전쟁 관련 인터뷰를 보면 전부 보병 출신이 하는데, 서운한 마음이 든다”며 “탄약 보급이 없었다면 어떻게 전투를 치를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총을 들고 직접 싸운 보병부대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한 지원부대의 공로 역시 제대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1953년 7월 27일 강원도 화천군 파포리에서 정전을 맞이했다. 그가 경기도 군포에서 적의 포탄 공격으로 입은 파편상은 전쟁의 상흔으로 남았다. 무거운 탄 박스를 나르다 보니 허리도 많이 나빠졌다.

피 흘려 나라를 지킨 만큼 양 지회장이 강조하는 것도 투철한 애국심이다. 그는 “전후 세대가 우리의 정신을 받아서 나라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애국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외국에서는 참전 용사들을 영웅 취급하는데, 대한민국은 어째서 나라 지킨 사람을 괄시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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