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소제 홍 8년(기원전 180) 3월 여후가 패수 기슭에서 액막이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파란 개 같은 짐승한테서 옆구리를 물려 통증이 심하여 점을 쳐 보니 억울하게 죽은 조나라 왕 여의가 앙갚음을 하고 있다는 쾌가 나왔다.

7월에 접어들면서 여후의 병은 더욱 위독해졌다. 죽음을 각오한 여후는 여녹을 상장군으로 임명하여 북군의 지휘를 맡기고 여산에게는 남군의 지휘를 맡긴 뒤 두 사람을 불러 놓고 말했다.

“고조는 천하를 통일한 다음 유씨 아닌 자가 왕이 되었을 때는 이를 처단하라고 서약을 시켰다. 어쨌든 우리 여씨 문중이 왕이 되었으나 중신들 모두가 결코 복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는 아직도 어리다. 내가 죽은 뒤에는 반드시 반격을 할 것이다. 정신 차리고 우선 군을 동원하여 궁중을 지켜야 한다. 장례를 치른답시고 그들에게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을 남긴 여후는 신사날에 죽었다.

여후의 유언에 따라 제왕에게는 천금을, 대신, 장군, 열후 및 관리들에게는 등급에 따라 돈을 하사함과 동시에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그리고 여산은 상국으로 임명되었으며 여녹의 딸이 신제의 황후가 되었다.
주허후 유장은 매사에 과감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우는 동모후 흉거이다. 둘 다 제나라 애왕(제나라 도혜왕의 아우)의 아우이며 장안에서 살고 있었다.

그 무렵 여씨 일족은 나라의 실권을 잡고 제위를 뺏으려고 일을 꾸미고 있었으나 고조 때부터 중신인 강후 주발과 관영 등이 마음에 걸려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허후의 아내가 여녹의 딸이었으므로 여씨네의 음모를 눈치 채고 있었다. 주허후는 그대로 있다가는 자신이 위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형인 제나라 왕에게 밀사를 보내어 여씨의 동정을 알림과 동시에 군대를 장안으로 보내어 여씨 일족을 없애고 제위에 오르도록 요청했다. 주허후는 중신들과 짜고 내부로부터 호응을 할 속셈이었다.

제나라 왕은 제후들에게 서신을 띄워 자신의 결심을 나타내었다.

“고조가 천하를 통일하고 유씨 일문을 왕으로 책봉하실 무렵에 부왕 도혜왕에게 제나라를 주셨다. 그 뒤에 도혜왕이 세상을 떠나자 혜제는 유후 장량의 건의에 의하여 신을 제나라 왕에 세우셨다. 혜제가 세상을 떠나자 여 태후는 나랏일을 마음대로 하고 여씨 일족만을 등용시키고 제멋대로 황제를 세우고 폐했다. 그리고 차례로 세 사람의 왕을 무단히 죽여서 양과 조, 연나라의 후계를 끊고 여씨로 바꾸었으며 제나라를 사분하였다. 충신들의 간언이 있어도 태후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젠 여후도 죽었다. 그러나 황제는 어려서 아직 천하를 다스릴 힘이 없다. 당연히 중신과 제후들의 도움이 기대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씨는 군사력을 과시하여 제후들과 충신을 위협하며 조칙이라 빙자하여 천하를 호령했다. 유씨의 사직은 이제 위기에 놓여 있다. 여기에 이르러 나는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올라가 왕의 자격도 없는 여씨 일족을 없애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궁중에서는 상국 여산 등이 영음후 관영에게 군사를 주어 제나라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관영은 형양에 도착하자 부하들을 모아 놓고 마음을 털어 놓았다.

“여씨 일족은 관중에서 병권을 한손에 쥐고 있다. 그들은 유씨를 모조리 쫓아 내고 제위를 빼앗을 속셈인 것이다. 지금 내가 제나라 군을 무찌른다면 여씨 일족에게 협력하는 꼴이 되는 게 아닌가.”

관영은 형양에 앉아 제왕을 비롯하여 제후들에게 사자를 보내 연합군의 결성을 제의했다. 제안을 받은 여러 왕들은 즉시 군대를 제나라 서쪽 변두리까지 접근하여 때를 기다렸다.

관영이 제나라를 치기 위해 떠나고 나자 여녹과 여산은 관중에 있는 여씨들을 제압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후, 주허후 등 유씨 세력이 켕기는 한편 제나라와 초나라의 군대도 얕잡아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토벌을 위해 출전시킨 관영이 배신할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온갖 궁리 끝에 관영이 제나라와 전투를 벌이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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