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여 태후는 한나라 고조의 첫 번째 부인으로 혜제와 노원공주를 낳았다. 고조는 한왕이 된 뒤 정도의 척희를 총애했었다. 이 척 부인이 낳은 아들이 뒤에 조나라의 은왕이 된 여의다. 고조는 여의를 몹시 사랑하였다.
태자 효혜는 매우 인자하였으나 사내답지 못하여 고조는 늘 못마땅해 하였다. 고조는 효혜를 버리고 여의를 태자로 봉하고 싶었다. 척 부인은 고조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황제가 궁궐을 떠날 때에는 항상 곁에 붙어 있었다.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가 낳은 여의를 태자로 봉해 달라고 눈물로 애원했다.

한편 여후는 늘 궁중에만 있었으니 고조의 얼굴을 맞댈 기회도 별로 없었고 소외당하기가 일쑤였다. 태자 효혜는 여의가 조왕에 오른 뒤에도 여러 번 폐위 직전의 고비를 넘기고는 했다. 효혜가 태자의 지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중신들의 간언과 유후 장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후는 남자를 능가하는 성품으로 고조의 천하 통일을 도왔다. 고조가 나라를 세울 때 이바지한 공신들을 차례로 죽이고 한나라의 황실을 태평하게 하는 데에도 여후의 도움이 컸었다. 여후에게는 오빠 두 명이 있었는데 모두 장군이 되었다. 큰오빠 주여후는 전사했으나 그의 아들 여태는 역후에, 여산은 교후에 책봉되었고 작은 오빠 여석지는 건성후에 봉해졌다.

고조는 재위 12년(기원전 195) 4월 갑진날에 장락궁에서 세상을 떠났고 태자 효혜가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다. 기회만 있으면 척 부인에게 복수를 하려고 벼르던 여후는 고조가 죽자 그녀를 영항(궁중 여관들의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 다음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왕을 즉시 입궐하라고 독촉을 했다. 그러나 몇 차례 사신을 보내도 조왕은 오지 않았다. 조나라 재상 건평후 주창(말더듬이로 태자를 고조가 폐하려 할 때 강력히 반대하였기 때문에 여후의 신임을 받았다)이 글을 올려 아뢰었다. “고조께서 승하하시기 전에, 조왕은 아직 어리니 소인에게 지켜주라는 분부가 계시었소. 들리는 바에 의하면 태후께서는 척 부인을 미워하시어 조왕까지 끌어내어 함께 죽일 생각이시라니 제가 어떻게 왕을 보내 드리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 조왕께서는 병으로 누워 있으니 올라가실 수가 없습니다.”

여후는 몹시 화를 내었다. 그녀는 주창을 조정으로 당장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주창은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 장안으로 올라왔다. 그 사이 여후는 또 사자를 보내 조왕을 불렀다. 마침내 조왕이 출발했다.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혜제는 태후의 속셈을 눈치 차리고 조왕이 도착하기 전에 패상까지 마중을 나가 함께 궁중으로 돌아왔다. 그런 뒤 언제나 조왕과 행동을 함께하면서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니 않았다. 여 태후는 좀처럼 조왕을 죽일 기회를 잡지 못했다.

혜제 원년(기원전 194) 12월에 황제는 사냥을 나섰다. 어린 조왕은 일찍 일어나지를 못해 뒤에 처졌다. 태후는 그것을 알고 곧장 사람을 보내 조왕에게 짐독(짐은 새의 이름, 짐의 날개를 술에 적시면 맹독이 됨)을 먹였다. 혜제가 사냥에서 돌아오니 조왕은 이미 죽어 있었다. 조왕의 후임으로는 회양왕 우(혜제의 복 동생)가 임명되었다.

여름이 되자 조칙을 내려 역후 여태의 아버지(여후의 큰오빠)에게 영무후를 추증했다.
여 태후가 벼르던 척 부인에 대한 복수의 기회가 왔다. 여후는 우선 척 부인의 손과 발을 잘랐다. 그런 다음 눈을 도려내고, 귀를 불에 지져서 오려내고, 약을 먹여 목 줄기를 태워 버렸다. 그리고는 변소에 버려 놓고 ‘사람 돼지’라고 이름을 붙였다.

며칠 뒤 혜제를 불러 사람 돼지를 자랑삼아 보여 주었다. 혜제는 처음엔 누군지 몰랐다. 그러나 척 부인이라는 소리를 듣자 충격을 받고 통곡을 하다가 그길로 앓아눕더니 일 년이 지나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혜제는 사람을 보내어 태후에게 탄원을 했다.

“그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닙니다. 저는 더 이상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겠습니다.” 그 뒤부터 혜제는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매일 같이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냄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단축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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