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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세종(世宗)이 중신(重臣)들과 유생(儒生)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448(세종 30)년 11월에 건립한 내불당(內佛堂)은 본래 문소전(文昭殿)이 위치하고 있던 자리였다

이와 관련해 문소전은 본래 태조(太祖)의 왕비(王妃)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의 사당(祠堂)으로 1396(태조 5)년에 건립한 인소전(仁昭殿)에서 시작되었는데, 1408(태조 8)년 태조가 승하(昇遐)하자 태종(太宗)은 부왕(父王)의 신위(神位)를 그곳에 모시며 이름을 문소전이라 개명하였다.

그 이후 세종은 그러한 전례(前例)에 따라 부왕과 모후(母后)의 신위(神位)를 광효전(廣孝殿)에 안치(安置)하였으며, 1433(세종 15)년에는 중국(中國)의 제도(制度)에 근거하여 신위들을 한 곳에 합사(合祀)하고자 새로운 문소전을 건립하였으나 그때는 원래 있었던 불당(佛堂)을 갖추지 못하였다.

한편 우여곡절 속에 내불당이 건립된 이후 세종은 닷새에 걸쳐 성대한 경찬회(慶讚會)를 개최하였는데 금주(琴柱)와 단청(丹靑)의 채색(彩色)이 빛나고 붉은 비단을 높이고 나무 향기 그윽한 가운데 전각(殿閣)에 금불삼존(金佛三尊)을 설치하였다.

또한 불당 밖을 흐르는 건천(乾川)에서 승려 700여명이 식사하였으며 닷새 동안에 쌀 2천 5백 70여섬을 사용하였으며, 새로 만든 악곡(樂曲)과 관현악기(管絃樂器)에 악공(樂工)이 50인, 무동(舞童) 10명이 예습하여 부처에게 음성공양(音聲供養)을 했으며, 종경(鐘磬)과 범패(梵唄), 관련 악기(樂器)의 소리가 궁궐에 널리 퍼졌다.

한편 경찬회를 성대하게 개최한 이후 세종은 1449(세종 31)년 겨울, 병석에 눕고 말았는데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創製)하는 과정에서 눈의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특히 중풍으로 인하여 언어장애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자와 중신들이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의 명의(名醫)들을 불러와 치료하였으나 호전(好轉)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중신들이 배천 온천으로 가시도록 했으나 고통이 심하여 치료를 멈추었으며 서울에는 명나라 사신의 영접도 있어 임금과 왕세자(王世子)는 병으로 인하여 영접은 하지 않았으나 세종은 사신 일행이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성삼문(成三問),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등으로 하여금 사신에게 한자의 중국 음운(中國音韻)을 묻게 하였다.

1450(세종 32)년 2월 초 4일 세종은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처소(處所)로 옮겼으며, 그 이후 2월 17일 영응대군 처소의 동쪽 별궁에서 오랫동안 신음하던 신병(身病)과 나라와 백성과 더불어 부처에 대한 정성과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향년(享年) 54세를 일기(一期)로 승하(昇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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