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세종(世宗)이 1443(세종 25)년 12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創製)한 이후 2개월이 지나서 최만리(崔萬理)가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에 대해 세종은 강경한 자세로 대응했다. 한편 세종의 명(命)을 받은 정인지(鄭麟趾), 권재(權宰), 안지(安止) 같은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들은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이와 관련해 ‘용비어천가’는 모두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종의 선조, 즉 목조(穆祖)부터 태종(太宗)에 이르기까지 6대의 행적(行跡)을 노래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 건국의 업적을 찬양하고 왕실의 영원한 발전을 기원하는 것이었는데, 훈민정음으로 지은 최초의 한글 문헌인 ‘용비어천가’에는 임금이 되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피나는 노력을 하여 덕을 쌓아 하늘의 명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세종의 뜻이 잘 나타나 있다. 

아울러 세종은 마침내 1446(세종 28)년 9월 훈민정음을 반포(頒布)하였는데 임금의 어제(御製)와 집현전 학사들의 서문(序文)이 실려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이 왕명(王命)으로 훈민정음의 내용을 자세히 해설한 ‘해례(解例)’를 별도로 만들었다. 이를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라 한다.

이와 관련해 훈민정음 첫머리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인용한다.

“나라 말씀이 중국에 달라 글자를 서로 통하여 아니할 새, 이런 전차로 어린 백성이 말하고자 함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할 사람이 많다. 내 이를 위하여 어여삐 여겨, 세로 스물 여덟 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로 씀에 전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이와 같이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표시하게 하려던 세종의 뜻은 이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직결이 되고 안 되고 간에 어렵게 한문만으로 써 오던 글을 일상의 우리말을 그대로 적을 수 있었음을 생각하는 데 큰 변혁(變革)이었다. 또한 이제까지 한자의 그 음과 뜻을 빌어 뜯어 맞추어 알아보기 어려운 기록을 하던 데에서 전혀 별세계로 비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 대에는 훈민정음 28자의 이름은 아직 없었으며 그 훨씬 뒤인 중종(中宗) 때 최세진(崔世珍)이 저술한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비로소 그 이름이 소개되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키워드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