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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세종(世宗)은 유교적(儒敎的) 가치관(價値觀)을 가지고 정치를 했지만 생활 속에는 불교신앙(佛敎信仰)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종(太宗)도 늙어서는 불교에 귀의(歸依)하였고, 태종의 후궁(後宮)인 의빈 권씨(宜嬪權氏)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또한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도 한때 불교에 귀의하였으므로 세종과 불교의 인연은 깊다고 할 수 있었다.

한편 1443(세종 25)년 세종은 효령대군의 청(請)을 받아들여 흥천사(興天寺)에 사리탑을 완성하고 경찬회(慶讚會)를 열었다.

이러한 세종의 불교신앙은 아들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도 불교를 믿게 되었으며, 특히 수양대군이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엮은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세종의 불교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즉위할 당시만 하더라도 태종의 정책을 계승하여 억불정책(抑佛政策)을 단행하여 유교입국(儒敎立國)의 국시(國是)를 시행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세종의 억불정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424(세종 6)년에 종단(宗團)을 통합한 것이었는데, 구체적으로 기존의 조계종(曹溪宗)을 비롯하여 천태종(天台宗), 종남종(終南宗)을 통합하여 선종(禪宗)으로 만들었고,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시흥종(始興宗)을 통합하여 교종(敎宗)으로 통합하였다.

이로써 기존의 7종이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축소되기에 이르렀으며, 전국적으로 36곳의 사찰(寺刹)만 남겨 두었는데, 이에 따라서 사찰에 포함되었던 토지와 노비가 몰수되었으며, 도성 밖의 승려에게 출입이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 어린 사람의 출가도 금지하였다.

그런데 억불정책을 실시한 세종의 심경에 변화가 생겨 태종이 승하(昇遐)하였을 때 명복을 빌기 위하여 사찰을 건립하려 하였으나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힌 적이 있었다.

특히 생전에 불교를 믿었던 소헌왕후(昭憲王后)가 1446(세종 28)년 3월에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서울 근처의 여러 절에서 재(齋)를 올렸으며, 1448(세종 30)년 7월에 궁성내 문소전(文昭殿) 서쪽 빈터에 불당(佛堂)을 건립하겠다는 뜻이 승정원(承政院)을 통해 중신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당시 유교유일사상(儒敎唯一思想)에 젖은 중신들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생(儒生)들도 반대하였으며, 성균관(成均館)과 사부학생(四部學生)들이 궁궐 밖에 몰려와 시위하고 동맹휴학(同盟休學)을 할 정도였으나 세종의 방침은 확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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