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image
ⓒ천지일보 2022.10.07

 

<22> 현대전자의 개발 생산 판매 제품

휴대폰사업, 반도체 이어 집중 투자

1994년 ‘시티맨’ 휴대폰 시장 출시

1997년 PCS폰 시대… ‘걸리버’ 인기 

 

PC 보다는 워크스테이션 개발 판매

게임기 ‘슈퍼 컴보이’ 효자매출 품목

1995년 대기업 첫 ‘PC통신 서비스

 

image
‘걸면 걸리는 걸리버’라는 유행어를 남기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현대 걸리버 폴더폰’. 당시 광고모델이었던 양택조와 박진희는 찰떡궁합을 선보이며 ‘걸리버 폴더폰’의 폭발적인 구매를 유도했다.

1983년 창업돼 아산 정주영 회장이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한 현대전자의 주력 품목인 메모리 반도체를 제외한 다양한 정보통신 관련 제품을 기술하면 하기와 같다.

1984년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자본금 5억원)가 설립돼 수도권을 중심으로 일반인들도 가입해 이용 가능한 카폰 시대가 열리자 당시 돈 좀 가진 부자들은 카폰 1대당 400만원(당시 소형 포니 자동차 가격과 비슷) 상당의 높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청약 접수대가 북새통을 이룰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초도물량으로 확보한 모토롤라사의 카폰 3000대는 즉시 매진됐다.

◆1989년 카폰 수출 10만대 달성

이런 상황을 인식한 국내 전자통신 단말기회사들은 현대전자(모델명: VTR-8300버튼식-전자식카폰)를 비롯해 삼성전자, 대영전자산업, 동양정밀공업사가 카폰을 개발 출시하면서 판가는 초기 4백만원대의 절반인 2백만원대로 하락했다. 어찌 됐던 그 당시는 부자들의 과시용 전유물로 여기게 됐고, 차량의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의 공간에 설치됐다. 또 차량 뒤쪽 트렁크 좌측에 길쭉한 안테나가 설치돼 안테나에서 받은 데이터(음성)를 이용해 통화를 가능케 한 카폰은 1세대 무선 핸드폰이었다.

1985년 현대전자는 핸드프리(수화기를 들지 않고도 통화가 가능한 기능)를 추가한 신모델을 출시하면서 시장에서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정주영 회장의 경영방식인 해외시장으로 일찌감치 눈을 돌린 현대전자는 1989년 카폰 수출 10만대를 달성했으며, 캐나다의 카폰 Big Buyer인 노바텔사와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yring) 방식의 수출 계약을 하고 북미주 지역을 대상으로 수출을 확대했다. 기타로 유럽,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수출 다변화도 시도해 성공시켰다. 1985년경 현대전자는 비교적 개발하기 쉬운 제품인 간단한 TV와 컬러 모니터를 제조해 국내 및 해외로 수출했다.

1995년 CRT(Cathode Rayt Tube)로 HD 수준의 화질을 구현하는 기술을 보유하게 된 현대전자는 사업 분야를 확대하고 ADSL 사업이나 LCD(Liquid Crystal Display) 모니터, 컴퓨터, 휴대폰 등 돈이 될 만한 사업 분야로 넓혀갔다. 현대전자의 출시제품에 대한 상세 설명은 하기와 같다.

1990년 초 현대전자는 일본의 휴대 게임기 오락기기인 닌텐도(Nintendo)사와 기술제휴를 국내 최초로 체결하고 닌텐도 제품을 수입해 ‘현대 슈퍼 컴보이’를 출시했다. 이 제품은 짧은 시기에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며 현대전자의 효자매출 품목이 됐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부자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친구 집에는 영락없이 2048가지의 화려한 색상의 실감 나는 입체화면, 박진감 넘치는 슈퍼스테레오사운드, 빠른 스피드, 슈퍼파워 기능을 가진 현대전자의 ‘슈퍼 컴보이’가 있었고, 이는 1990년대 ‘인싸’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2인 플레이가 가능한 대전 격투 게임과 달리 ‘슈퍼 컴보이’의 치명적 단점은 1인용이라는 것이지만 제품은 불티나게 판매됐다.

image
ⓒ천지일보 2022.10.07

◆현대전자, 삼성전자와 선의의 판매 경쟁

추후 삼성전자는 일본 SEGA사와 기술제휴로 ‘삼성 겜보이’를 출시해 대대적인 광고를 하면서 현대전자와 선의의 판매 경쟁을 펼쳤다. 또한 현대전자는 컴퓨터를 개발 출시도 했다. 주요 고객은 그룹사의 업무용이었고 일반용으로도 출시했는데 당시 인기 개그맨인 ‘김국진’을 광고모델로 기용해 “밤새지 마란 말이야”라는 멘트의 방송광고를 하면서 정부 기관, 중소기업 등에서 대중적인 인기 제품으로 자리했다.

현대는 PC(PersonalComputer)보다 규모가 큰 대형컴퓨터 시스템(모델명 하이서 13000)과 하드디스크 7개를 장착해 대용량의 정보저장이 가능한 워크스테이션(모델명 엑실서버420)을 개발해 1차로 서울아산병원에 공급하면서 전국소재 아산병원으로 확대해 약 30여대를 공급했다.

워크스테이션은 1기가(1천 메가) 바이트의 주기억장치를 지원하고 최대 240기가바이트의 저장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CAD/CAM 등 공학용뿐만 아니라 은행과 일반 중소기업 등에 적합한 컴퓨터였다. 또한 통신 스위칭 장비도 개발해서 미국 알렌텍사에 공급했고,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인 동남아 시장으로 판매를 확대했다.

현대전자는 휴대폰 사업으로 영역을 키워갔다.

정몽헌 회장이 반도체사업 다음으로 비중 있게 추진한 휴대폰사업은 1994년 ‘시티맨’이란 휴대폰을 시장에 출시하면서 당시 인기배우인 ‘박상원’을 전속모델로 기용했다. 또 1997년 ‘현대 걸리버’란 브랜드를 가진 PCS(Personal Communication Service)폰을 출시했다.

당시 CF에서 인기 연기자인 ‘하일’이 걸리버로 분장해 출연하면서 대중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광고했다. “걸면 걸리니까 걸리버지예”란 대사로 인기를 끌었다.

1999년에는 원로배우 ‘양택조’와 ‘박진희’를 광고모델로 기용했다.

당시 박진희는 걸리버 폴더폰의 엘리베이터 편 광고에서 미끈한 다리에서 단말기를 드러냄으로써 작고 깜찍한 걸리버 핸드폰 폴더라는 시각적인 효과를 가져다줬다. 모델 양택조와 박진희의 찰떡궁합을 보여준 광고였고, 다리를 완전히 드러낸 박진희는 쑥스러워하면서도 몸매를 과시하는 자신 있는 포즈로 각선미를 노출해 당시 남성들의 폭발적인 구매를 유도했다.

2000년부터는 신세대들을 타깃으로 한 시각적 기능이 강화된 휴대폰 ‘네오미(NEOMI)’란 브랜드 휴대폰을 출시했다. 이 모델은 셀루러용 ‘HGC-R401/402’ 및 PCS용 ‘HGP-R4010’이며, 네 방향 검색키를 채택, 버튼 하나로 자유롭게 인터넷 검색을 즐길 수 있었다. 또 액정화면은 최대 7줄까지 입력할 수 있는 와이드 LCD 화면을 채택한 획기적인 휴대폰이었다.

image
현대전자는 1994년 휴대폰 ‘시티맨’을 출시하고 당시 인기 배우 박상원을 전속모델로 기용했다.

◆국산 CPU 개발 포기 후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

현대전자는 1990년대에 국산 CPU 개발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당시에 K-DOS라는 것이 출시되었을 무렵이었고, 삼성전자도 동참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사태가 발생하면서,  

삼성전자는 시장성이 없을 것이라 예상하며 발을 뺐고 DEC, Alpha와 생산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현대전자는 독립적으로 연구개발을 하다가 결국 CPU 개발은 포기하고 그냥 메모리 사업으로만 집중했다.

여담으로 1990년대 중반 미국 현지법인 HEA에서 Axil이라는 브랜드로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워크스테이션 호환 기종을 만들어 판매한 적이 있다.

국내에도 들여와서 주로 현대그룹 기업에서 사용했으며, 제품에 대한 검증이 완료되자 자신감을 얻은 현대전자는 일반판매도 했다. 현대전자는 PC통신이 대중화되던 시절인 1995년 국내 대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아미넷’이라는 이름으로 PC통신 시장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냈다. 당시 인터넷이 대한민국에 생소했던 시절 최초로 인터넷 기반 PC통신 서비스를 개발했다. 그 당시 개발 주역이 창원시에 기반을 둔 프로야구팀을 운영하는 엔씨소프트의 창업주 김택진 대표이다.

1996년 서울 중심으로 상용화 서비스를, 그해 5월 27일부터 전국상용화 서비스를 시작했다. 1997년에는 ‘신비로’ 브랜드로 서비스를 했다. 현대전자는 현대자동차에 들어가는 카오디오 등 전장부품을 개발하고 현대자동차에 납품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추후 타사 차량에서도 채택이 되면서 기아와 대우, 쌍용자동차에도 공급했다.

그리고 삼성전자가 인수를 포기한 세계적인 하드디스크(HDD) 사업체인 맥스터를 전격적으로 인수하면서 세계시장 2위 HDD 회사로 급속 성장을 했다. 마지막으로 현대전자는 각 사업부가 2001년 계열사로 분리 독립했다.

끝으로 현재 기준으로 보면 현대전자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린 회사가 되어 버렸지만, 대한민국 반도체산업의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대북사업을 이어받아 의욕적으로 추진(금강산관광 등)을 했던 정몽헌 회장이 남긴 흔적은 영원히 살아서 우리들 가슴속에 깊이 남아있을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정리=유영선 기자)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키워드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