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장량은 몸이 약하여 장군으로 전쟁터에서 싸움을 한 일도 없고 오직 고조 옆에서 참모 역할만 하였다. 그러나 고조는 장량을 평가하면서 장막에서 작전을 세우고 능히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했다며 그에게 제나라의 3만호의 영지를 내리며 희망하는 장소를 택하라고 했다.

그러자 장량이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소신은 하비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유 땅에서 폐하를 처음 뵈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준 인연이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소신의 작전을 자주 채택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성공을 거둔 것은 오로지 운이었습니다. 소신은 유 땅만으로도 족합니다. 삼만 호를 주시다니 분에 넘칩니다.” 한왕 고조는 소하의 공적을 책봉할 때 장량을 유후로 봉했다.

같은 해 봄에는 큰 공을 세운 신하가 20명이나 포상되었는데 그 밖의 공신들에 대해서는 경쟁이 심하여 평가가 제대로 끝나지 않아 봉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조가 낙양의 남궁에 머물던 어느 날 2층 복도에서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장군들이 여기저기 무리지어 앉아 무슨 말인지 수군거리고 있었다. 고조는 유후 장량에게 물었다.

“저 자들은 지금 왜 몰려 앉아 수군거리고 있소?” 장량이 말했다. “반란을 모의하고 있는 중입니다.” 고조가 의아해 물었다. “천하가 안정되었는데 반란은 또 뭐요?”

유후 장량이 말을 받았다. “폐하께서는 한낱 서민으로부터 일어나서 저 사람들을 부려 천하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천자가 되셨다고 하는 마당에 봉지를 받은 사람은 소하와 조삼, 옛날부터 폐하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들뿐이고, 한편 죽음과 벌을 받은 자는 평소부터 폐하의 미움을 샀던 사람들입니다. 지금 담당 관리가 개인공적을 일일이 평가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줄 봉지를 다 합하면 천하의 땅을 다 내주어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저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은, 폐하께서 자신들 모두에게 봉지를 내리지는 못할 것 같다. 그렇다면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오히려 죽음과 벌을 내리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여 저렇게 모여 앉아 반란을 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조는 얼굴을 찌푸리며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고 유후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평소에, 그중 못마땅해 하셨고, 그것도 남들이 다 아는 행여 그런 인물이 있습니까?” 고조는 손벽을 치며 “있다마다. 그건 옹치지. 옹치는 옛날부터 내가 감정 있지. 그 자는 나를 여러 번 골탕 먹였지. 지금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은데 공이 커서 참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우선 옹치에게 봉지를 내리시고, 많은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것을 발표하셔야 됩니다. 옹치가 봉지를 받았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조용해질 것입니다.”

고조는 그 말에 따라 신하들에게 술자리를 베풀고 옹치를 십방후에 봉하는 한편 승상과 어사를 독촉하여 상을 주는 일을 조속히 매듭짓도록 명령했다. 많은 사람들은 술잔을 내려놓고 모두 환성을 올렸다. “옹치도 후가 되었단 말이야, 이제 우린 기다리기만 하면 돼.”

세월이 지나자 유후 장량은 스스로 말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韓)나라에서 재상을 맡아 왔었다. 한나라가 멸망했을 때 나는 많은 돈을 들여 원수인 진나라에 보복을 감행하여 천하를 놀라게 한 바도 있다. 오늘날에 이 세치의 혀끝으로 제왕의 군사가 되었으며 1만 호의 영지를 받아 열후의 자리에도 앉았다. 한낱 서민으로 떨어져 버렸던 몸으로 이보다 더한 영달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장차 속세를 버리고 적송자(상고 시대 선인)처럼 선계에서 살고 싶다.”

그렇게 말하고는 곡식으로 만든 음식을 끊고 도인의 법(신선의 수업)을 실천하며 몸을 가볍게 하는 일에 전념했다.

고조가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황제에 올랐고, 유후를 은인으로서 존경한 여후는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제발 익힌 곡식을 먹으라고 강권했다. “인생은 한 번 뿐이오.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오. 무엇을 바라기에 그처럼 스스로를 괴롭히시는지 알 수가 없소.”

유후는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고조가 세상을 떠난 지 8년 만에 유후도 세상을 작별했다. 시호는 문성후, 아들 불의가 유후의 작위를 이어 받았다.

그 옛날 하비의 다리 위에서 태공망의 병법서를 그에게 준 일이 있는 노인이 13년 뒤에 다시 만나자고 한 바로 그해 장량은 고조를 따라 제북 땅을 지나고 있었는데 곡성산의 기슭에 가보니 노인이 말한 대로 과연 황석 바위가 있었다. 장량은 이를 가지고 돌아와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유후가 세상을 뜨자 이 바위도 함께 무덤에 합장되었으며 봄과 가을의 제사 때에도 같이 모심을 받았다. 장량의 큰아들인 유후 불의는 한나라 효문제 5년에 불경죄에 연좌되어 봉지를 몰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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