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주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5개월을 남겨 둔 시점인 2007년 10월 4일 평양을 방문해 고(故)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나눈 정상 간 대화록을 접하고 느낀 소회는 여간 착잡한 것이 아니다. 막 나간 대화에서는 놀라운 충격이 전해지며 품위를 잃은 정상의 언행은 우리를 허탈하게 해준다. 전격 공개된 대화 문건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얼굴이 화끈거리며 붉으락푸르락해지는 당혹감을 내내 감출 수가 없었다. 더구나 반국익적이며 반국가적인 발언들을 서슴없이 내뱉은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저 기가 막힐 뿐 할 말을 잃는다. 대한민국의 정상이, 우리 손으로 뽑은 우리의 최고 지도자가 이런 정도의 인물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느냐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전체의 대화를 통해 노무현은 들떠있고 너무 서두르며 덤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는 모든 외교 행위에 있어 금기다. 그는 또 고주알미주알 모든 것을 까발리는 다변과 밴댕이 속을 보여주듯 뱃속을 훤히 보여주는 실수를 범했다. 이에 비해 노련한 독재자 김정일은 상대를 가볍게 간파하고 도리어 말을 아끼고 절제하며 짐짓 대화에 무성의한 듯 수세적이었다. 덤비는 노무현의 예봉을 적절히 피하기도 하고 적당히 응수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대화는 갑(甲)과 갑(甲)의 대화가 아니라 우월한 갑과 졸라대고 사정하는 을의 대화처럼 되고 말았다. 남과 북의 현 상황을 볼 때 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갑은 당연히 노무현이 돼야 맞다. 김정일에게 무엇이 꿇릴 것이 있었느냐 하는 말이다.

대화중에 이런 대목들이 있다. 노무현은 말한다. ‘말씀 드릴게 더 남았습니다. 아니면 위원장 말씀 그냥 한두 시간 듣는 것만이라도 들어야 하니까요. 연일 줄여서 말씀하시니까.’ 이에 김정일은 ‘양건 동무한테 얘기 들었는데 우리 상임위원장이 너무 오래 설명했다고 그러더군요.’ 김정일의 이런 대답에 김만복 국정원장이 좀 더 대화를 하라고 거들지만 김정일은 ‘뭘 더 얘기하지요? 기본적 이야기는 다 되지 않았어요?’라고 한다.

노무현은 ‘올라 올 때 확대 정상회담, 단독 정상회담 그렇게 알고 올라왔거든요. 아침에 다 얘기 했으니까, 오후에는 보지 말고 가라 이러면요…’라고 말하자 김 위원장은 ‘정례 회담이라고 말한 거, 내가 스쳐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얘기하는데, 양 국가가 아닌 이상에는 한 민족끼리니까 정례다, 정례합시다, 이런 것은 내가 꼭 아버지 집에 설날 음력설에 찾아가는 거는 도덕이죠. 간다, 가야 된다, 딱 밝힐 필요 없죠’라고 받는다.

그러자 노무현은 ‘수시로 보자고만 해 주십시오’라고 사정하듯 말하고 김은 ‘수시로? 문제가 있으면 그저 상호 일이 있으면, 호상 방문하는 거고…’ 하고 건성으로 대답한다. 노무현은 이 대답을 이어 ‘일이 있으면… 일 없으면 볼 일 없다 이렇게 느껴지니까 그러지 마시고…’라고 끊어지려는 대화를 이러보려는 듯 말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노무현은 대화 말미에 ‘청을 하나 드리겠다’고 전제하고 ‘임기 마치고 난 다음에 위원장께 꼭 와서 뵙자는 소리는 못하겠습니다만, 평양 좀 자주 들락날락할 수 있게 좀.’이라고 하자 김정일은 ‘우리야 언제든지 침구는 항상 준비해놓고 있겠습니다’라고 가볍게 대꾸한다. 노는 다시 ‘특별한 대접은 안 받아도…’라고 덧붙인다. ‘들락날락’이라는 표현은 자기를 낮춤으로써 친화를 꾀해보려는 의도가 배어있어 보이긴 한다. 하지만 공식 석상에서 정상급 행위를 묘사하는 용어로 쓰기에는 가당치 않다. 상대에 대한 과공비례(過恭非禮)나 자기비하가 엿보이는 표현이다.

애써 예쁘게 보아주려 한다면 노무현의 화법은 그의 독특한 캐릭터(Character)가 반영된 화끈하고 직선적인 화법, 흉금을 튼 스스럼없고 자연스러운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평화와 우호가 흐르지 않는 관계에서 정제되지 않은 이런 식의 대화는 거꾸로 이용당하거나 되치기 당하기 십상이다. 전체적으로 노무현의 화법이 조악한 것은 실무적으로 사전적인 의제의 조율이나 대화를 끌어가는 절차와 방법에 대한 연구와 준비, 예행연습이 부족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화자(話者)가 자신의 화술(話術)을 과신한 나머지 대화 현장에서의 즉흥성이나 순발력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대화가 정밀하지 못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어느 시골 동네 사랑방에서 이루어진 보통 사람들의 방담처럼 되고 말았다. 그런데 차라리 노무현 김정일 간 정상회담의 수위가 그 같은 시골 사랑방 방담쯤으로 흘려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심각하고 착잡한 소회만을 가질 필요는 없다.

무슨 말인가. 상대는 과거에 우리에게 저지른 행적으로 보아 ‘말은 달지만 뱃속에 칼을 품은 구밀복검(口蜜腹劍)’의 호전적인 독재자였다. 그런 상대에게 감성적인 다변도 모자라 그의 의중에 맞장구를 치매 애써 거스르지 않으려는 저자세의 화법으로 일관되고 있다. ‘핵 문제를 얘기하라는 것은 판을 깨라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BDA 문제는 미국의 잘못이다’ ‘나는 북한을 대변해왔다’ ‘제일 큰 문제가 미국’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역사가 세계 인민들에게 반성도 하지 않았고 오늘날도 패권적 야망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다’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해 미국이 만들어온 작전계획 5029는 그거 못한다 해서 없애 버렸다’ 등 김정일에게 특급 공로훈장이라도 받아야 할 말들을 골라서 하고 있는 것이다. 명백히 반 국익, 반국가적인 말들이다. 그는 국민 전체의 공감대에 기초해 국익을 치열하게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 신념 또는 자신과 신념을 공유하는 일부 세력을 대변했다.

급기야 북방 한계선인 NLL도 김정일의 책략과 야심에 내맡겼다. ‘괴물 같은 NLL에 대해 위원장님과 인식을 같이 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피로 지킨 우리의 바다를 저들에게 그렇게 헤프게 내어 주다니, 정말 노무현은 큰 일 낼 뻔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그 때 이 나라 전체가 저들 손에 바쳐질 순간이 멀지 않았었다는 아찔한 전율을 지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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